붉은 열매에 담긴, 한겨울 희망의 불
한겨울 골목은 소리가 멀다. 나무들은 잎을 거두었고, 바람은 건조한 금속성으로 길을 훑는다. 그때, 담장 구석에서 붉은 점 몇 개가 어둠을 찌른다. 잎이 다 떨어진 뒤에야 선명해지는 것. 줄기는 가늘고 비스듬하지만, 열매는 묵묵히 남아 있다. 배풍등은 화려한 계절을 통과해도, 마지막 장면을 조용히 책임지는 식물이다.
붉음은 과장이 아니다.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해서 더 또렷해진 사실에 가깝다. 가을에 달렸을 때보다, 차갑고 맑은 공기 속에서 의미가 커진다. 다수가 사라진 뒤에 드러나는 소수의 빛. 배풍등은 말한다. 존재감은 때로, 늦게 온다. 남아서 증명하는 방식. 급하게 피었다 져버리는 기술 대신, 오래 남아 제 빛을 잃지 않는 기술.
우리는 보통 성장을 여름으로만 기억한다. 그러나 어떤 성장은 한겨울에 확인된다. 떠들썩함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남아 있는 것들. 지워지지 않는 점, 잊히지 않는 색. 배풍등의 붉음은 방향을 알려주는 표식처럼 작동한다. 돌아갈 집이 모호할 때, 저 멀리서도 보이는 작은 신호. 희망은 커다란 구호가 아니라, 길 찾기 표식처럼 작게 빛난다.
상실의 끝에서도 그 신호는 유효하다. 커다란 복구를 당장 해낼 수 없을 때, 하나의 붉은 점을 확보하는 일. 매일 한 문장, 한 통의 안부, 한 번의 산책. 남겨둘 수 있는 최소한의 색을 정하고, 거기에 체온을 보태는 일. 배풍등은 견디는 법을 드러내지 않고 가르친다. 빛이 부족할수록, 색은 더 깊어진다고.
배풍등의 줄기는 기대는 법을 안다. 담장, 철사, 옆 식물—무엇이든 의지한다. 혼자 버티지 않겠다는 선언이, 오히려 오래 버티게 한다. 의지와 의존 사이의 얇은 선을 조심스럽게 걷는다. 붙잡을 것을 고르고, 무게를 나눌 상대를 정한다. 붉은 열매는 그 협상의 결과로 겨울까지 남는다. 혼자 선 강함보다, 함께 버틴 탄력이 길다.
나는 오늘 내 하루의 붉은 점을 하나 정한다. 커다란 성취 말고, 방향을 잃지 않게 해 줄 표식 하나. 아침에 적는 짧은 문장, 저녁에 보내는 한 줄의 안부, 잠들기 전 책 한쪽. 이 점들이 이어지면 선이 되고, 선은 다시 길이 된다. 길이 보이면, 겨울도 통과할 수 있다. 배풍등이 보여준 건 거창한 희망이 아니라, 길 찾기의 밝기다.
해가 낮게 기울고 붉은 점들이 더 깊은 색으로 가라앉는다. 차갑지만 선명한 오후. 나는 그 선명함을 내 호흡으로 옮겨 온다. 크게 바꾸지 않고, 확실히 남기기. 잎이 다 지고 나서야 드러나는 것들처럼, 내 안의 남음도 오늘 비로소 빛을 가진다. 작고 정확한 불씨 하나면 충분하다. 꺼지지 않게만, 계속.
깜별이의 메모
공사장 철판이 찬 공기에 수축하며 짧게 울리고, 바람이 담장 위를 넘어온다. 깜별이는 붉은 열매 아래 그늘에 몸을 반쯤 말고 앉는다. 고양이의 눈은 크지 않은 것에 길게 머문다. 열매 하나에 시선을 고정하면, 주변의 소음이 자연히 멀어진다. 필요한 건 소거다. 덜 보고, 덜 듣고, 하나에 오래 머무는 연습. 깜별이의 호흡이 붉은 점의 속도를 닮아 간다.
- 네가 겨울을 건너기 위해 오늘 남겨둘
‘붉은 표식’은 무엇일까?
위 이미지는 AI 생성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