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일. 편도선

by 한톨

어릴 적에 편도선이 잘렸다. 사고가 앗아간 것이 아니라 의도한 수술이 떼어갔다. 이유는 코골이가 심해서였던 걸로 기억한다. 사실 잘은 모르겠다. 그에 대해 아무리 캐물어도 수술을 하게끔 만든 당사자, 다시 말해 의사가 아닌, 보호자는 알아듣기 어려운 말로 얼버무릴 뿐이다.

모든 자식은 저마다 문제를 겪는다. 문제의 시작점에 보호자가 자식과 함께 있다고 해서 보호자가 문제 원인이라고 말할 순 없고 그들을 비방할 수도 없다. 그러나 문제가 끝날 때까지 보호자가 자식과 함께 있다면 보호자는 무책임하다는 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무엇도 원하지 않았다. 태어나길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보호자께선 나를 얻고 나서 새 몸이 생긴 마냥 좋아했다. 여전히 그럴 때가 있다. 여전히라고 말하자니 보호자를 더는 보호자라고 부를 순 없다. 그것은 내가 심하게 아플 때나 쓸 수 있는 말이다. 부모님이라고 부르겠다. 내가 만약 태어나길 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나를 잉태한 정자는 다른 정자보다 열심히 난자에 파고들어 수정시켰고, 태아가 된 나는 어떻게든 세상에 나오기 위해 예정보다 두어 달 일찍 나왔으니까.

만약에 인간에게 자아가 없다면 자식은 부모의 닮음꼴이자 대를 이을 유전자다. 다만 인간에겐 고집스러운 자아가 있다. 자기가 무엇이라고 주장하는 그것이 있다. 그 자아는 미워하는 게 많다. 특히 자신을 만든 부모와 세상을 미워한다. 왜 미워하는가 하면 자신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건 답이 되지 못하지만, 그런데도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인생에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부모는 일단 아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 조건, 예컨대 키나 외모, 그리고 성별 따위도 아니다. 그에 더해 최초의 사회인 가정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는가, 사회성을 기를 수 있었는가, 유년기를 망가뜨릴 만큼 거대한 사건을 당했는가, 그로부터 성격이 만들어진다. 어찌 보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건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

공평한 세상, 평등한 세상. 그런 세상을 맘껏 비웃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내가 겪은 문제로부터 벗어나자 내가 풀어야 할 숙제가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른 건 그닥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세상이 멸망한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나를 모욕하거나 심지어 때린다고 할지라도 중요한 일은 아니다. 내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을 한다면 다른 일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일이든 막간극일 뿐이다. 진짜 연극은 내가 주도한다. 그때까지 이런저런 일을 겪을 수도 있고, 코골이가 듣기 싫은 부모가 편도선을 잘라갈 순 있어도, 내가 죽지 않는다면 연극은 비로소 피어난다.


그냥 좀 아쉽다. 어릴 적에 치아 교정을 받으라는 진단을 집으로 들고 왔으나 10살짜리 아이에게 “치아 교정 하고 싶니?”라고 묻고 하기 싫다니 바로 안 한 부모가 어째서 편도선 수술은 가벼운 마음으로 시켰을까.

지금도 가래침을 모으지 못해서 가래가 생기면 그냥 삼킨다. 내가 기억하기로 어릴 적, 수술을 하기 전엔 가래를 모아서 맘껏 뱉을 수 있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카악퉤’였을까. 더럽지만, 정말로 그랬다.

인생은 인정하기 싫은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잘려나간 편도선처럼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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