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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성 Apr 14. 2024

글쓰기 연습장 1

2022년부터


한 가지 깨달은 바가 있다면, 생각보단 행동을 하는 편이 더욱 행복하다는 것이다. 행동은 다른 행동을 야기하고, 좋든 싫든 결과를 만들어 내니까.


나는 내 안에 숨어 살았었다. 그래서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다.

숲 속의 잠든 공주처럼 누군가 나를 구해주리라 믿었으나, 누구도 나를 구하지 못했다. 그래서 스스로 잠에서 깨어나 숲 밖으로 나가고자 하지만 두렵다. 숲에만 있어도 살 수 있는데 뭣하러 그래야 하는가, 그러나 숲 밖에는 세상이 있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세상이.


요즘 나는 벌거벗은 기분이다. 내가 달리진 게 없다고 느낀다. 그렇다고 더 나빠진 것 같진 않다.


나의 성씨나 유전자, 키나 신체 조건 따위는 중요치 않다. 나는 그냥 나다. 나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살가죽이 있는 존재일 뿐이다. 그거 말곤 중요한 건 없다.


상상이 너무 쉽게 떠오른다. 불쑥 고개를 내밀어 나를 마음대로 휘젓다가 지루한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나는 상상의 장난감이 되어, 내가 하는 생각의 노리개가 되어, 시간만 낭비한다.


세상이 제시하는 기준은 터무니없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어쩌면, 완전히 틀린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그러기로 하였다.

적어도 그러기 위해 노력하기로 하였다.


항상 까부는 아이가 무대 위에 서면 수줍음을 타듯, 나의 생각도 나올 공간을 주면 숨는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숨어버린 생각과 마찬가지로 내가 알고 있음에도 행하지 않는 행위들을 떠올리면, 부끄러운 마음만 남는다.

아는 대도 행동하지 않는 것은 모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어떤 날은 글쓰기보다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나, 그럼에도 나는 글을 쓴다.


글쓰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영혼을 나눈 혈육 같다. 아무리 싫고, 밉더라도, 내가 나로 존재하는 동안 결코 떼어낼 수 없는 혈육 같다.


지금 머릿속에 있는 모든 생각을 끄집어내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생각은 늙은 태아처럼 죽고 말 것이다. 생기 있게 살아있을 몸짓이 더러운 오물이 되어 몸 밖으로 나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작가인 ‘나’와 주인공은 아예 다른 인물이다. 신과 내가 완전히 다른 인물인 것처럼 그러하다.


재능은 태어나지만, 실력은 다듬어진다. 재능이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예술 및 체육 분야는 재능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는 분야 같다. 다른 분야 또한 마찬가지이나, 예체능 분야는 유독 그것이 심하다. 재능이 아예 없으면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나은 것이 예체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고 믿으며 예술에 발을 들이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갖고 태어난 사람은 가진 것만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를 통해 그들이 잃는 것도 많다. 그들은 없어본 적이 없다. 배고팠던 적이 없는 사람은 굶주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선택할 수 있다. 스스로 굶주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가끔가다 보면 인생이라는 건, 밤하늘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분별하게 흩어져 있는 달과 우리네 인간의 모습은 똑 닮았다. 그저 운이다. 그것이 그곳에 있을 확률은 운이다. 그걸 운명이라 부르든, 우연이라 부르든, 달라지는 건 없다. 그것이 그곳에 있다는 것,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 내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것은, 운명이든 우연이든, 현실일 따름이다. 그리고 내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듯 우리네 인생은, 뭐라고 정의할 수도 없고, 형용할 수도 없는 것 같다.


만약 누군가 나를 화내게 할 작정으로 행동한다면, 나는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돈을 요구하는 강도에게 돈을 주는 것과 같다.


인생은 불확실하고,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런 인간이 만든 세상은 불완전함투성이다. 미완이 모여 더 큰 미완을 만드는 것. 결함이 있으나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것. 그것이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내 안에 있는 그것은 주먹보다 작고 단단하다. 손을 꽉 쥐면 작지만 단단한 힘이 느껴진다. 그것보다 더 작고 더 단단한 어떤 것이 내면에 있다. 그것은 씨앗과 닮았다. 그러나 무형이다. 무형의 씨앗이라 어떤 힘으로도 부실 수 없다. 어떤 외적 힘도 그것을 부실 수 없다. 만약에 씨앗을 깨뜨리겠다고 나에게 압력을 가하여 내가 죽는다고 해도, 그 씨앗은 깨지지 않는다.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다. 그 씨앗을 깰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질 뿐이다. …… 그 씨앗은 누구도 깰 수 없다. 그 씨앗을 깰 수 있는 이는 오로지 나뿐이다. 그러나 그 씨앗은 마치 암세포처럼, 나보다 생명이 길다. 그 씨앗을 표현할 수 있는 건, 예술뿐이다. 그 씨앗을 후대에 전하는 것, 예술로 남기는 것, 그게 내 사명이 아닐까 싶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그리고 가능성을 좀 포기하기로 했다. 내가 나로 산다고 하더라도 나는 나의 일상 속에 부유하는 특정 존재가 될 뿐이다. 내가 완전히 나일 수는 없으나, 나의 모든 것은 타인과 세상이 보기에, 나의 행동과 외면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안다. 그건 심신미약과 같은 이유가 아니다. 나는 때로는 내가 아닐 수도 있으나, 그런 내가 아닌 내가 ‘좋은’ 나도 아니고 ‘싫은’ 나도 아니다. 그건 부정적이지도 않고 긍정적이지도 않은 어떤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내가 모르는 나의 어떤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의식’으로 뭉뚱그려 표현하기엔 어려운 부분이다.


나이를 먹으니까 진실은 진실로, 거짓은 거짓으로 남겨두는 것이 진정한 진실임을 깨닫는다.


온 우주가 나에게 덤빈다고 해도 내가 나를 지키고자 한다면, 나는 나를 지킬 수 있다.


성관계만을 위한 관계는 오로지 성적 쾌락만을 목적으로 한다. 나는 그런 관계를 일컬어 ‘둘이서 하는 자위행위’라고 하겠다. 그리고 오로지 돈만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도 있다. 그런 일은 돈만 받으면 된다.


불행은 날 외롭게 만들었고, 외로움은 나를 고립되게 만들었으나, 역설적으로 그들은 나에게 위대한 스승이 되었다.


나를 깨야 한다. 나를 깨부수어 독특한 감각을 일깨운다면 나는 소설가로 성공할 것이다.


도망치고 싶다. 회피하고 싶다. 내가 벌인 얼마 안 되는 일로부터 도망치고 싶고 회피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이미 일을 벌어놓았다. 그것은 내게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 인생의 등불이다. 그들이 없다면 나의 존재도 사그라진다. 그러나 그것이 난 두렵다. 그래서 도망치고 싶다. 회피하고 싶다. 반딧불이처럼 정처 없이 떠돌고 싶다.


나는 언제나 나에게 어떤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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