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숙경
이야기는 병 속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누구는 폭죽처럼 터지는 게 좋다 했고 나는 소리 없이 터지는 게 좋다 했다
술병이 술을 버리고 나면 비로소 보이는 푸른 세계
아무 생각하지 않을 때의 텅 빈 머릿속 같거나
무릎을 꺾어야 속이 보이는 드럼세탁기 구조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가끔 수평이 맞지 않을 때가 있다
너무 깊고 파래서 아찔하기도 한 소용돌이
―아직 너를 잘 모르겠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보지만 바닥이 보이질 않아
창가에 나란히 세워진 빈 병을 비문(非文)이라 읽어도 비문(碑文)이라 읽어도 좋아서 우리는 거품을 마신다 푸른 색깔은 물고기들이 좋아해서 물고기처럼 뻐끔거린다 한 모금씩 뻐끔거릴 때마다 입속에 갇힌 말들이 늘어나는 빈 병의 속도로 뛰쳐나온다
―오래전 토했다 삼켜 버린 희미한 기억이 뱀처럼 대가리를 세우고 올라올 거야
―감기는 눈을 비비고 나면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보일 거야
만월은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구름과 어둠 사이를 흘러가고 날마다 술을 끊겠다는 그녀의 다짐은 자정의 문턱을 넘으면서 다시 허물어진다
사과를 받으려면 그녀의 가방에 들어 있는 사과를 꺼내야 하네라는 말을 누군가 꺼낼 때 우리는 대답 대신 술잔을 부딪친다
키보드 첼로 드럼 연주에 맞춘 재즈풍의 노래이거나 오래된 팝을 들으며 마시는 블랑의 세계 오렌지와 시트러스향의 조화로움이 한 모금의 아이스와인처럼 입안을 맴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