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산동 그, 집

by 박숙경

비산동 그, 집


박숙경




왼쪽 옆 머리카락이 몽땅 잘린 채로 딸아이가 들어왔다


혼자 웃다가 들킨 낮달을 바깥에 세워 두고

문고리도 없는 미닫이문을 닫고서

집주인이 아닌 내가 서러워 괜한 말을 마구 쏟아 냈다

화난 엄마가 처음인 듯 아이는 다섯 살처럼 울었고

울음 그치기도 전 주인집 여자가 자기 딸을 두들겨 패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집 아이에게 미안해졌다


집에 있는 여자들은 아이를 봐 가면서 마늘을 까거나 알밤을 깎거나 우산을 꿰매거나 가만히 놀지는 않았다

비산동이지만 가난했고 가난했지만 자주 모여 밥을 비벼 먹기도 했다

가끔은 없는 사람의 뒷담화가 귀신처럼 골목을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온 여름 혈서만 쓰다가 실한 열매 하나 매달지 못한 석류나무가 작은 마당을 지키던 집

연탄아궁이 하나에다 찬장 하나가 전부였던 부엌살림과 연탄재를 들고 청소차를 따라가다가 엎어졌던 기억조차 아프지 않은, 마당의 수돗가에서 비 맞으며 설거지와 빨래를 해도 시리지 않던 지금은 희미해진 동네가 나에게도 있었다


한참을 문밖에 세워 둔 낮달에게 이제야 새삼 미안하기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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