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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숙경 May 28. 2024

오래 문밖에 세워둔 낮달에게

그리하여, 숲이라 말하는


그리하여, 숲이라 말하는

박숙경


고물상들이 떠나간 후 그곳이 되었다
하늘은 유월 장마를 쉽게 내려놓지 않는다

가지를 옮겨 다니는 직박구리 목청이 경쾌해지자
특별한 바람이 등 뒤로 지나간다

오솔길이 넓은 길로 바뀌고부터
길은 심심하다는 말을 잊어버린 듯했고
길 가장자리에 나란히 신발을 벗어놓는 습관이 사람들에게 생겼다

맨발로 걷는 일이 의식 같고 고해성사 같다
나도 어떤 무게인가를 벗어 저들처럼 얌전히 놓고
그늘과 햇살을 골고루 밟으며 걷는다

쥐며느리가 죽은 쥐며느리를 흘깃 보며 지나가는 일
발에 닿은 성질대로 순하기도 까칠하기도 한
이런 기분들을 신 대신 신어보는 일
사람들이 오래된 표정을 벗은 것처럼 걷는다

넝쿨장미 향기와 까치 발자국과 줄지은 개미와 떨어져 밟힌 오디는
서로 수혈을 하는 중이다

함지산 기슭에서 건너온 검은등뻐꾸기 소리와
직선으로 꽂히는 햇살이 함께 흔들어보는 나뭇가지

줄사철 아래 메꽃은 며칠에 하나씩 연분홍 식구를 늘이고


-시집『오래 문밖에 세워둔 낮달에게』(달아실출판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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