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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세 Oct 19. 2024

<도가도 비상도>

도그마는 피할 수 없다

“도를 도라고 부르면 더 이상 도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노자 1장 1절이다.  인간 이성과 인식의 한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이성과 사고가 끊임없이 의심하고 탐구하며 진리에 다다르고자 노력하지만 그것은 과정일 뿐이다. 오류를 피할 수 없으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확고한 진리가 아니며 언제든지 틀릴 수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진리라고 확신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우리는 이를 독단, 도그마라고 부른다. 도그마는 피하기 어렵다. 특히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나 명제, 믿음이 실천을 통해 검증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점쟁이의 말을 듣고 사법고시에 합격할 것이라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말이다. 50%의 확률임에도 그 사람은 평생 무속의 맹신자가 된다.


인간의 뇌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고 강화시키려는 쪽으로 두뇌를 작동시킨다. 기존의 인식을 버리고 새것을 택하기보다는 그쪽이 에너지의 손실이 적다. 확증편향이다. 고통스러운 포기와 새 출발보다는 기존 인식을 강화하는 쪽으로 정보를 취사, 선택한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자신을 돌아보려고 노력하기가 쉽지 않다.


퀄리아라는 용어가 있다. 뇌의 개성이라고 설명한다. 똑같은 대상을 보아도 서로 다른 해석이나 느낌을 가지고 사람마다 독특한 해석을 하게 만든다. 이 퀄리아로 인해 인간은 다양한 개성을 갖게 된다. 개성과 다양함은 인간고유의 특징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되는 속성 또한 가지고 있으니 바로 추상화와 이론, 개념을 만드는 능력이다. 이론과 개념은 다양한 개성을 드러내는 현상을 추상화시켜 체계적인 사고로 만든다. 이데올로기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이 플레임을 가지고 세상을 해석한다. 세상은 하나의 이론으로 해석하기에 너무 넓고 다양하지만 다 무시하고 이론이나 이념으로 재단해 버린다. 모양을 특정할 수 없는 살아있는 현실이 삼각형이나 사각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프레임은 확증편향의 경향과 결합되어 강고하고도 변하지 않은 사상이나 이념의 형태로 개인의 사고 안에 체화된다. 그리고 체화된 이념은 행동양식과 사고방식을 지배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나아가 타인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동조화시키려는 특징까지 지니게 된다.  


성리학은 500년 조선왕조를 지배한 대표적인 사상이다. 일부의 사람은 이 성리학 때문에 조선이 망하고 식민지배를 가져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성리학은 사상의 구성이 완벽할 정도로 체계적이며 전일적이다. 우주론, 심성론, 통치철학까지 연결된 거대한 사상체계이다. 부품을 갈아 끼우듯 새로 생겨난 새로운 사고의 흐름과 대체되기 힘들다. 변화에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북한의 주체사상 또한 마찬가지다. 주체사상은 그 전일적 체계로 인해 한 번 그 사고 체계 안에 들어가게 되면 완벽하게 그 사상에 동조하게 된다. 다른 생각이 스며들 여지가 없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좌우의 이념대립도 강고하게 형성된 사고체계들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다.  둘 다 불완전한 사고체계이지만 이를 맹신하며 서로 갈등하고 증오하게 된다.


이러한 사고체계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배제와 혐오의 방식으로 서로를 대한다. 증오와 적대감을 표출한다. 인간은 굉장히 똑똑하지만 한편으로 어리석다. 그래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실에서 직접 의미를 찾아내고 해석하기보다는 기존에 자기가 가진 이론이나 이념의 사고틀에서 관성적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자기가 믿고 있는 이념이나 이론이 진리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임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와 다른 믿음의 체계를 가진 사람과 소통하며 진리에 한 발 더 다가서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틀린 것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인간이 가진 인식의 한계이다.


더구나 이러한 인식체계를 통해 지금까지 자기의 존재기반을 만들어 온 경우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존재가 자기 존재기반을 위협한다고 여긴다. 이것은 본능적이다. 그래서 소통보다는 배제와 제거라는 방법을 선택할 가능성이 많다. 인간 세상에서 대립이나 갈등을 피하기가 어렵다. 상대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더욱 어렵다. 개별존재가 자기 존재의 유지를 위해 다른 존재를 부정하는 비극이 생기게 된다. 원래 인간은 다른 인간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진화론에 근거해 따져보면 도덕의 발생원인도 공존을 위한 협력에 기반하고 있다.


대립과 갈등, 화해와 공존, 선과 악. 이런 말들이 요즘 나의 머릿속을 계속 맴돈다. 존재의 유지를 위해 자기 욕망에 충실한 인간의 모습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모든 개인이 자기 욕망에 충실할 때 본능과 본능의 충돌은 필연적이다. 생존의 유지를 위해 획득해야 할 재화는 언제나 한정되어 있고 경쟁은 피할 수 없다. 이런 공동체 안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까? 묻지 않을 수 없다. 오로지 선의로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한강의 노벨상 수상을 폄훼하는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궁금해서 그들의 댓글을 따라가다가 문득 이러한 현상이 단순한 질투만이 아니라 거대한 사고체계, 나아가 인간 존재의 본질적 양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노자의 첫 구절이 떠올랐다. 나를 지배했던 이념의 도그마를 반백년을 살고 나서야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슬프기도 하지만 어찌할까? 지금부터라도 살아있는 현실을 제대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렇게 또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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