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2025. 4월 16일 (수)
오리엔탈리즘
몇 해 전 모 종합편성 채널에서 국내의 정상급 가수들을 데리고 유럽의 도시에서 길거리 공연을 하는 음악프로그램을 시리즈로 방송한 적이 있다. 시즌 3까지 진행하고 코로나를 겪으면서 공연장소를 한국으로 바꾸어 시리즈를 이어갔다. 나도 코로나가 유행하던 그 시절 가수들의 공연을 보면서 견뎌내던 그 순간이 추억으로 떠오른다.
시즌 3까지의 외국공연을 보면서 그 프로그램을 기획했던 스태프들의 기획의도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스태프들이 밝힌 프로그램의 기획의도를 보면 가수들이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거리에서 관객들을 만나면서 순수한 음악의 열정을 되살려 본다는 취지에서 제작되었다고 밝혔다. 나는 그 취지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고 특히 시리즈 2의 거의 모든 음악클립들을 즐겨 감상했다.
나는 그 스태프들이 말한 기획의도 말고 또 다른 사고방식이 이 프로그램을 제작하는데 작용했다고 생각했다. 왜 하필 외국일까? 한국이 아니고. 그것도 왜 유럽일까? 남미가 아니고. 사실 그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가수들은 모두 국내의 정상급 가수들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 공연을 본 사람들은 공짜로 콘서트를 본 것이나 마찬가지다. 노래 잘하기로 소문난 한국 사람들이고 그중에서도 최고들의 공연을 감상한 것 아닌가? 그들이 왜 외국으로 나가서 노래를 불러야 했을까? 나는 이 발상이 어느 개인의 개성이나 색깔이기보다는 한 사회나 공동체 안에 공유되고 있는 집단적인 원형의 생각이라고 판단했다. 그것은 바로 칼 융이 말했던 집단 무의식이다. 아마 기획자들도 본인이 지닌 집단 무의식을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것은 바로 오리엔탈리즘이다. 중세 유럽사회가 지리상의 발견으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하면서 세상이 넓어졌다. 아주 원시적 개념의 세계화가 이루어졌다. 그 뒤 동양으로 가는 육지 루트도 개척되면서 아시아, 아프리카도 유럽인들의 인식 안에 들어온다.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인이 바라보는 동양, 아시아 아프리카에 대한 인식이다. 핵심은 자신들보다 더 열등하다는 사고방식이다. 그들은 침략과 약탈로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확보했다. 그들의 눈에는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모든 것들이 자신들보다 더 하등 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사람들도 이러한 서구인의 생각을 자신의 내면 안에 고착시켰다. 그래 맞다. 저들은 우리보다 뛰어나. 그래서 우리가 발전하려면 저들을 배워야 해. 이른바 근대화의 시작이다. 근대화는 다른 말로 서구화이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적으로는 평등사상이 근대화의 핵심 요소들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는 제3세계국가들이 따라 배워야 할 모델이었다. 근대화를 가장 빠르게 가깝게 실천한 나라가 이웃나라 일본이다. 아시아를 벗어나 구미유럽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가졌던 일본의 젊은 개혁가들은 탈아입구의 강렬한 의지로 근대화개혁을 성공시켰다. 메이지 유신이다. 물론 그 오만과 자신감이 침략전쟁으로 이어져 많은 아시아의 나라를 전쟁으로 고통으로 몰아갔다.
발전된 서양을 배워야 한다는 사고는 동양인들의 가슴속에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인 오리엔탈리즘을 내재화시켰다. 역사를 배울 때도 유럽중심의 세계사를 배우며 중동이나 아시아의 역사는 스쳐가는 하위부류의 한 챕터가 되었다. 이 모두가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이다. 그래서 뭘 해도 흔히 말하는 선진국과 비교하고 나아가 그들로부터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다. “봐봐 우리 이만하면 잘하지?” “노래도 한국말로 할 거야. 어! 그런데 박수를 쳐주네. 와 우리 대단한 거 같아. 드디어 인정받았어.”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거쳐 갈 수밖에 없는 과정임을 안다. 그런데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되었다. 자기 정체성을 재정립할 때가 왔다.
2인자 전략의 한계
선두를 쫓아가는 뒤처진 사람들이 주로 쓰는 전략이 앞선 사람의 하던 방식을 그대로 따라 모방하는 것이다. 선두주자가 범하는 시행착오를 줄이고 성공여부를 확인한 뒤 그대로 따라가면서 위험을 줄이는 것이다. 아이폰을 따라가면서 몸집을 키웠던 갤럭시가 선택한 방식이다. 아직 역량이 부족한 2인자가 취할 수 있는 합리적인 전략이다. 그러나 2인자 전략은 한계가 있다. 스스로를 2등이라고 생각하는 한 결코 1등이 될 수 없다. 사고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직급도 없애고 호칭도 바꾸고 기를 쓰고 1등이 되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제는 내가 2등이 아니고 1등이야> 1등이 되려면 1등처럼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 물론 애써 1등임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노력은 주체의 자발적인 노력도 필요하지만 판이 뒤집히는 객관적 상황, 기회가 필요하기도 한다. 2020년 그 판이 뒤집히는 기회가 전 세계를 강타했다. 코로나의 창궐은 정말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세상을 뒤바꾸는 요소가 우연히 찾아오기도 한다는 사실을 실제로 증명했다. 중세 유럽인구의 절반이상을 감소시켰던 페스트처럼 코로나도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기회를 잡는 것은 준비된 사람만이 가능하다.
마냥 2등인 줄 알았던 대한민국이 1등으로 나서는 기회가 만들어졌다. IT를 이용한 방역시스템, 높은 시민들의 참여의식, 행정부의 기민한 대응력으로 전 세계인이 따라 배울 모범을 창조했다. 문화적으로는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가 기존의 문화콘텐츠 유통시스템을 세계화시켰다. 이미 문화적으로 세계는 하나의 단일한 국가이다. 지역과 문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이러한 대 변화 속에서 한국인 특유의 창조성이 빛을 발하고 있다. 풍부한 감성과 특유의 부지런함, 탁월한 창조성이 노래나 영화, 드라마를 통해 전 세계인의 공감을 불러오고 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음식, 패션, 뷰티산업까지 ‘K’라는 브랜드의 네이밍 아래 세계를 주도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백의 민족의 K-방산, 무기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면 외화를 벌어들이는데 한 몫을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을 사랑한다. ‘한글’은 AI가 사랑하는 극강의 언어시스템이다. 전 세계 대학에 한국어강좌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 K-민주주의. 가장 평화적인 방법으로 폭력을 제압하고 야만을 이성으로 이겨내며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국민들의 높은 의식 수준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이 모든 것이 최근 5년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다. 문화지체가 발생했다. 바뀐 사회현상을 의식이 따라가지 못한다. 의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서구사회를 보며 동경하고 그들을 따라 배우려고 했던 시절이 있었다. 주어진 조건에 따라 열심히 살다 보니 어느새 앞에 보이던 선두주자가 보이지 않고 맨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가는 길이 곧 뒤에 있는 사람들이 따라오는 길이다. 지금부터는 개척자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개척자는 외롭다. 제일 먼저 실수하고 제일 먼저 넘어진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좋은 지도자를 만나야 한다. 아니 선택해야 한다.
평화를 사랑한다.
백의민족,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강대국이라 불리는 국가들이 둘러싸고 있다. 지정학적 위치는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내가 잘하면 몸값이 올라간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평화를 사랑한다. 내가 세상의 중심임을 굳이 강조하는 중화사상도 없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호감도가 높다. 힘을 가지고 세상을 지배하며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려는 야심도 없다. 오직 함께 살며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 그뿐이다. 내가 한 말이 아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한 말이다. 소아를 버리고 대아를 취할 때 세상의 중심에 선다.
마냥 밝기만 한 것은 아니다. 화려하고 세련된 영광 뒤에는 어둠도 있다. 극심한 빈부격차. 경쟁과 물신주의 속에 피폐해져 가는 정신도 문제다. 나는 신용카드 빚때문에 일가족이 집단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세계 어디에서도 들은 적이 없다. 청소년들의 살인적인 교육환경도 달라져야 한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의대 입시를 준비한다니 이게 본인의 의지인가? 교육개혁이 절실하다. 앞으로의 과제이다.
나는 한 개인에 불과하지만 나를 둘러싼 사회, 국가의 운명과 나의 운명이 별개의 문제일 수 없다. 엄청난 변화의 가운데 절망보다는 희망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젊은이들은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해 낙심하고 좌절하기보다는 눈을 들어 전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기회를 찾기 바란다. 시야를 넓히기를 바란다. 세상이 달라졌고 할 일이 정말 많다.
큰 어려움을 잘 이겨냈으니 이제 다시 시작이다. 잘 헤쳐나가기 위해 지혜를 모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