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형 AI의 등장
인간은 자신이 본 사물이나 존재에 대해 자신이 느낀 감흥을 글이나 음악, 그림이나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표현한다. 또는 대상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아 세상에 밝힌다. 자기만의 해석이 있을 수도 있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기도 한다.
예술의 본질은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첫째는 창작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창조의 과정이고 두 번째는 감상자의 입장이다.
창작자의 입장에서 보면 타고난 재능이나 훈련을 바탕으로 아주 많은 노력을 통해 일련의 창작과정을 몸에 익힌다.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존재를 세상에 표현하고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예술가는 창조의 과정에서 좌절과 고난을 겪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창조의 기쁨을 누린다. 기쁨과 고통은 예술의 모순이다. 자기 존재의 실현과정에서 겪는 좌절과 상처는 예술로 승화된다. 따라서 예술가에 고난과 상처는 역설적이지만 축복이다.
두 번째 감상자는 왜 예술작품을 감상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시학>에서 카타르시스라는 말로 예술 감상의 본질을 설명했다. 작품과의 대화를 통해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감동이라고도 한다. 작품 속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힘 속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슬픔을 느낀다. 인간에게는 그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다른 하나는 작품 속에서 예술가의 고난과 좌절, 노력을 느끼는 것이다. 감정이입해서 그의 인생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그런데 단지 예술작품의 기술적 완성도에만 주목해서 예술작품을 감상한다면 굳이 사람이 만든 것만을 볼 필요는 없다. 인공지능이 만든 작품의 기술적 완성도는 시간의 문제일 뿐 결국에는 인간을 압도할 것이다. 감상자가 애써 창작자의 고뇌나 인생을 알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 작품이 지닌 아우라. 다른 말로 창작자의 전 인생에 걸친 스토리와 그 작품의 고유한 개성을 느끼고자 한다면 인공지능이 그린 그림을 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피아노연주를 듣기도 하지만 보기도 한다. 연주자가 열정적으로 연주에 몰입하는 그 모습이 나의 감정을 자극한다. 아이러니하게 실수도 존재한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 실수마저도 그 연주의 일부인 것이다. 완벽을 향해 노력하는 가운데 그가 치러야 했던 고뇌와 피나는 연습의 시간들이 그 작품 안에 녹아 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인공지능의 창작과는 비교할 수 없다. 인공지능은 다만 흉내 낼 뿐이다. 모방에만 그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논란은 존재한다.
1917년 뉴욕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 출품된 남성의 소변기는 예술에 대한 몇 가지 고정관념을 바꾸어 놓았다. 이 소변기는 원래 모습에서 90도 돌린 채 거기다가 출품한 작가 마르셀 뒤샹의 서명을 한 뒤 <샘>이라는 이름으로 출품했다. 논란이 생기자 이 작품은 전시에서 제외되었고 이를 항의한 뒤샹은 협회 이사직에서 사퇴했다. 그 당시의 진품은 사라지고 추후에 만들어진 8개의 복제품 하나가 프랑스 파리 퐁피두 센터에 전시되어 있다. 정확한 가격은 알 수 없지만 수십억 원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뒤샹의 소변기가 일으킨 논쟁은
1. 자신이 직접 작업하지 않아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가?
2. 소변기가 아니라 <샘>이라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만으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가?
이미 설치미술의 경우 그 압도적인 스케일 때문에 작업과정에서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의 경우 가수 겸 화가인 조영남 씨의 화투연작 시리즈 대작논란이 대법원 무죄판결을 받으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런 논란을 인공지능과 관련시켜 보면 인공지능을 활용한 예술작품의 등장은 필연적이다.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은 위에 서술한 바이다.
결국 이 문제는 창작자의 견해와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대중의 정서와 연동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뒤샹의 <샘>도 그런 과정을 거쳤다. 자기 존재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 실현과정에 외부의 도움이 개입되는 것은 진정한 자기실현이 아닌 것이다. 대신 만들어주면 만드는 나의 고통과 기쁨은 사라진다. 대중과의 소통이나 공감이라면 얼마든지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창작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가장 주목할 것은 돈을 벌기 위해 대중의 정서에 부합해 대량으로 생산해 내는 행위이다. 현재 생성형 인공지능의 수준으로 볼 때 빠르게 소비되는 대중문화의 경우 스토리와 음악과 웹툰에서 충분히 많이 활용되리라고 본다. 오락적 기능의 관점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돈을 지불하는 감상자의 몫이다.
활용이냐 의존이냐 하는 그 경계의 선상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며 전개되어 갈 거라고 본다. 나는 지금 활용과 의존의 범위와 경계에 대해 많은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창작자나 감상자 개인이 선택해야 할 문제이다. 이 문제는 정답이 없는 문제이다. 다만 관심 있게 지켜보려 한다. 인공지능을 활용했는가를 의무적으로 밝혀야 하는가의 문제도 논쟁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