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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왕의 교훈

판단의 기준

by 헤세

그리스인들이 만들어낸 그리스 비극은 운명과 삶에 대한 통찰이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상황, 즉 운명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태도에 대한 미메시스이다. 우리 삶에 그러한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아직 자기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 비극이 없음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로부터 2000여 년 후 한 위대한 작가가 다시 비극을 노래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배우 출신의 작가가 다시 비극을 재현한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의 비극은 인간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 시기와 질투, 권력에 대한 야심이 비극을 불러온다.


<리어왕>은 어리석은 왕이었다. 자신의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세 딸에게 이른바 충성맹세를 확인한다. 권력에 대한 충성이기보다는 딸들의 효심을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큰 딸과 둘째 딸은 인간이 말할 수 있는 모든 언어를 동원해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증명한다. 그러나 셋째 딸은 고지식했다. 결혼을 앞둔 셋째 딸은 남편을 사랑해야 하니 언니들만큼 아버지에게 마음을 줄 수는 없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리어왕은 두 딸에게만 자신의 전 재산을 나누어 준다.


독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리어왕이 참으로 어리석어 보인다. 사람을 보는 안목이 한 나라의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수준에서 한참 떨어진다. 결과는 비참했다. 재산을 물려받은 두 딸은 결국 아버지를 배신했고 리어왕은 두 눈을 잃고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를 죽음으로 치른다.


여기까지 보면 일반 사람들은 흔히 “저 바보 같은 리어왕” 저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는가?

<나는 저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라며 스스로를 위안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 정도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나의 기대가 속절없이 무너진 게 지지난 20대 대통령 선거 때의 윤석렬의 당선이다. 결과가 확정된 그날 밤 당시 내 눈에는 국민들의 절반 이상이 리어왕처럼 보였다. 그리고 예상했다.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될 거라고.


사람들이 굉장히 똑똑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리어왕의 가장 큰 어리석음은 무엇인가? 감언이설에 현혹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윤석열을 검찰총장에 임명할 때 그의 개혁의지를 확인했다고 했다. 누구보다 검찰개혁에 열정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고 순진했다. 대목은 두고두고 역사에 회자될 것이다.


말보다 중요한 게 무엇인가? 행동 아닌가? 평생을 통해 반복된 행동패턴은 하루아침에 달라지지 않는다. 결혼을 앞둔 커플이 서로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긴 시간의 동거 아니면 한 달 이상의 동반여행이다. 자신의 24시간을 상대에게 노출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말만 듣고 그 사람을 믿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선거기간 동안의 압도적 미디어 공세에 많은 사람들이 판단능력을 잃고 여론에 휘둘린다. 미디어의 문제는 여기에서는 논하지 않겠다. 정보를 수용하는 보통사람들의 입장에서만 살펴보겠다. 후보들은 온갖 달콤한 말로 유권자를 현혹한다. 따지고 보면 그런 유명정치인의 삶에 대해 일반 개인들이 접하는 정보라는 게 미디어를 통한 정보 말고 없다. 얼마든지 이미지세탁이 가능하다. 이미 여론조사는 너무 오염되었다.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댓글부대 또한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 절반이 <리어왕>처럼 현혹된 것이다. 물론 확고한 가치관에 근거해 선택한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국익에 지대한 손상을 입혀도 지지해 줄 확고한 30%의 보수 세력이 있다는 건 여러 차례 확인되었다.


현 정부의 인사가 진행되면서 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실망과 낙담의 이야기도 들리고 희망찬 이야기도 들린다. 하지만 여기서도 일반인들이 접할 수 있는 정보라는 게 대부분 미디어의 평가이다. 교차검증이 필요한 대목이다. 또 한 가지 공직후보자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확인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모든 사람을 다 만족시키는 인사는 없을 것이다. 지켜보고 확인하며 실수도 하면서 한발 한발 걸어가는 방법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비판을 허용하라. 다른 생각이 있음을 인정하라. 민주주의의 핵심가치는 나와 다른 생각을 허용하며 공존하는 것이다. 단 상식을 벗어나는 의견은 제외이다. 60이 다 된 나이에 전 재산이 2억밖에 없는 사람을 검증하겠다며 전부인, 현부인을 다 청문회에 부르겠다는 그런 정신 나간 소리는 무시해야 한다. 상식이란 일반인들의 정상적인 판단이며 그 기준은 헌법과 법률이다. 내란 세력의 쌉 소리는 무시하고 가는 게 맞다. 건강한 논쟁은 장려할 일이다.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럽다. 인간에게는 생각을 하나로 통일시키려는 본성이 있다. 뇌의 인지효율성 때문이다. 다름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픈 생각이 거기에서 나온다. 본성을 이겨내는 게 문명의 힘이다. 말이 아닌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을 보는 것이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완벽을 지향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류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감내하며 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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