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따라 구례 하동에서 1박2일

2025년 6월 8~9일

by 임경환

첫째 날:구례 오일장~사성암~ 섬진강 대숲길~ 쌍산재~운조루~

둘째 날: 섬진강 뚝방~평사리공원~ 하동 송림~섬진강 습지공원 ~망덕포구~구례


가는 날이 장날이다.

구례 오일장날이다.

지금 시골 오일장은 다 죽었지만 구례 오일장은 아니다.

펄펄 살아있다. 주차할 자리가 없을 정도다.

적은 돈으로 많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곳,

형형색색의 사람들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는 곳,

저 흥청거리는 인파, 늘어놓은 노점에 쭈그리고 앉은 상인들과

그 앞에 놓인 온갖 잡품들,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신이 난다.


사람은 늘 유년을 품고 다닌다. 시골장은 내 유년의 추억을 불러준다.

지금 나는 50년 전 내 고향 도리원 장날에서의 나랑은 완전히 다르다.

세월이 지나 나는 어느새 부자가 됐다.

싱싱한 살굿빛 살구도, 검붉은 오디도 턱턱 산다.

꽈배기 살 돈도 있고 다슬기 살 돈도 있다.

돈이 많으니, 마음이 푸근하다.

유과가 눈에 띈다. 어머니가 만들던 바로 그 사각형 유과다.

주인이 전통유과라면서 오직 자기 집에서만 취급한단다.

감사한 마음으로 그것도 한 봉다리 산다.

농사 외에 부업으로 어머니가 만들어서 팔던 유과랑 같은 모양이다.

찹쌀 반죽을 홍두깨로 펴서 기름에 튀겨냈던 그 유과,

자식 입에 넣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 자식들을 자기처럼 살게 하지 않기 위해선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고

어떻게든 돈을 만들어야 한다.


남매들 몰래 맏아들인 내겐 진짜 좋은 유과를 주기도 했지만

주로 기름에 튀기다가 불량품이 생기면 그걸 챙겨주던 어머니,

난 지금 유년에 먹어보지 못한, 하자 하나 없는 고급 품질의 유과를

내 돈 주고 아낌없이 먹어대며 시장에서 어슬렁거린다.

그럴 만큼 부자가 되었어.

그렇게 구례 시장에서 돈을 물 쓰듯 쓰면서

어려서 누려보지 못한 사치를 누린다.

한 오만 원은 썼나 보다. 그깟 오만 원이야 껌이다.


구례 오일장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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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꽈배기를 먹으면서 재잘거리던 동료들이 떠나고

천천히 사성암으로 간다.

주차하고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산비탈에 있는 암자로 간다.

바위 벼랑에 있는 암자라 주차 공간이 부족한가 보다.

수직 암벽 아래 암자가 있다.

처음은 아니군, 언젠가 왔었어.

나이를 먹으면서 시간을 소유하게 되지만 기억은 희미해지고 소실하게 된다.

그것도 신기하다.

어찌 살날이 짧아지는데 시간이 더 많아지는지!


네 명의 고승이 이곳에서 수행해서 사성암이란다.

옛날이니까 그렇겠지.

사실 지금이야 그 고승들보다 더 경험 많고 더 공부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

하긴 뭐 나이를 먹어가면서 성숙하는 사람도 드물지….

천천히 둘러본다.

절벽에 있는 약사전에 마애여래입상도 있다.

불교용어는 어렵다.

마애여래입상이란 바위에 암각으로 새겨진, 서 있는 부처님상이란다.


사성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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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입상이고 도선굴이고 모두 둘째다.

느리게 흘러가는 섬진강이 저 아래 있다.

구례 들판을 구불텅거리며 흐르는 섬진강과 강 건너 지리산을 보면

저절로 반쯤은 득도가 될 거 같다.

지리산이 온갖 계곡을 섬진강으로 연결해 맑은 물을 제공한다.

그래서 섬진강이 우리나라 강 중에서 가장 맑고 아름답구나!


섬진강 건너 사성암 맞은편 강가에 있는 대나무밭으로 들어간다.

장대만 한 키의 대나무들이 햇빛이 들어올 수 없을 만큼

빽빽하고 거대하게 서 있다.

진녹색 줄기는 손톱도 안 들어갈 만큼 단단하다.

아까 본 사성암의 마애여래입상이

노인이 된 원효스님이 입적하기 전에 바위 절벽에 손톱으로 그렸다고 하는데

바위이길 얼마나 다행인가?

아마 이 대나무에 대고 그리라고 했다면

손톱이 부러진 노인 원효는 숙제를 마치지 못해 고승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맨발로 그늘진 대숲길을 걷는다.

대나무밭에 어울리는 바람이 살랑인다.

어떤 바람도 대나무밭에만 들어오면 저렇게 된다. 순해지고 시원해지지.

손바닥에 대나무의 시원한 느낌이 전해지듯이

바람도 대나무를 만지면서 시원해지고

대나무 냄새를 품고 대숲 사이를 헤치면서 느려지는 거 아니겠어?



섬진강대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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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절벽에 오르지 않아도

대나무밭에 스치는 바람을 느껴도 깨달음을 얻을 거야.

부처도 보리수 그늘에 앉아서 깨달았다잖아.

굵고 힘이 센 죽순들이 뾰족하게 올라선다.

잎 하나 없이 줄기 하나로 어떻게 저렇게까지 올라가는지 모르겠다.


또 섬진강을 건너고 마산천을 건너 쌍산재로 간다.

만 원을 내고 음료수를 하나 받아 들고 들어가면 젊은이들로 북적인다.

고택이 숲과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인간의 손길이 미쳤으면서도 인공적인 흔적이 없으며

건물이며 정원 돌길이 자연스럽다.

절제하면서 공을 많이 들였군!

익어가는 보리수를 단 나무들이 발갛게 서 있다.



쌍산재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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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조루로 간다.

쌍산재와 비슷하나 규모가 작다.

역시 조선 후기 양반 가옥의 형태다.

이 집은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말로 유명하다.

‘누구나 열 수 있다’라는 말로,

양식이 부족한 이웃이 언제든지 와서 쌀을 퍼갈 수 있도록 쌀독에 구멍을 냈단다.

양반이지만 부자였으며 훌륭한 인품을 갖춘 주인이었어.

할머니 한 분이 대문간에 앉아 겸연쩍은 얼굴로 입장료를 받는다고 한다.

돈 천 원 받는 걸 미안해하신다.

‘타인능해’라고 쓴 집이라서 더 그런가?

할머니가 곱게 나이 드셨다.

그래! 어떻게 잘 살아서 나도 저런 모습으로 나이 들자꾸나.

할머니는 나와 성별은 다르지만, 나의 롤모델이야.

집은 자그마하고 여느 고택이다.

단지 쌍산재만큼 넓지도 온갖 것을 갖추지도 않는 수수한 양반가이자

부자티가 안 나는 부잣집이다.

쌍산재만큼 정성으로 꾸민 것이 아니라 그냥 옛것을 잘 유지하고 있다.

유명하지 않아선지 손님이 나밖에 없다.

덕분에 대청에 올라 오랫동안 고요히 머물다 간다.



운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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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휘날릴 때만 와보던 쌍계사 십리 벚꽃길이 한적하다.

내가 좋아하는 찻집, 광양 백운산이 마주 보이는 집의 뜰에서 커피를 한잔한다.

평일 저녁에 역시 손님은 나 혼자다.

역시 한국의 정원이 좋다.

정원이 손을 보는 듯 안 보는 듯 은은하다.

자로 잰듯하고 싹둑싹둑 자르고 오와 열을 맞춘 정원을 보면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이 찻집 정원에 향기 나는 장미가 적적하게 피어있다.

많이도 적게도 아닌 적당히 은은할 정도의 향기가 나는 꽃밭에서

차를 한잔한다.


카페 뜰에서 백운산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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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휘날릴 때 쌍계사에서 평사리까지 섬진강 뚝방길을 걸어본 적이 있다.

몇십 년이 지나 생생하게 기억하는 걸 보면 대단한 하루였음이 틀림없다.

이번엔 강을 따라 난 도로로 천천히 차를 몰아간다.

어느 뚝방 근처에 멈춘다. 갈 수가 없다.

화개장터와 평사리 사이 도로를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차를 세우고 뚝방에 올라서면

구부러지는 섬진강변을 따라 금계국이 흐드러지고 있다.

지리산 첩첩산중을 헤집으며 길을 찾는 섬진강을 따라 꽃이 흐드러진다.

강이 길을 내면 꽃이 찾아와 자리를 잡는다.

산이 있으면 자연히 개울이 생기듯이 그런 이치야.

강변의 금계국과 띠꽃들이 강을 따라 줄지어 구부러진다.

나도 모르게 꽃들의 행렬을 따라 구부러지게 걷는다.

푸른 물과 하얀 모래밭, 초록빛 강변을 배경으로 노랗게 펼치는 꽃길은

세상에 여기뿐이며 이때뿐이다.

초여름의 어느 섬진강 뚝방에 머무르기로 한다.



섬진강 뚝방의 들꽃, 금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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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쁜 길에 사람 하나 없다니,

저렇게 핀 꽃을 봐주는 사람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사람들은 하나같이 바쁘고, 바보구나.

내가 그 모든 인간의 무지와 미안함을 대신해서 밤새 머물기로 한다.

뚝방의 자전거길이 햇빛에 달구어져 적당히 따뜻하고

모기가 견디지 못할 정도의 강바람이 살랑이며 불어댄다.


밤엔 달이 오른다.

달이 꽃을 은은하게 밝히고 나랑 그 꽃들을 바라본다.

다들 어디 갔어?

세상천지에 이 좋은 풍경을 두고 사람들은 어디에 갔을까?

달빛은 말할 수 없기에, 이 강둑에 올라 ‘초여름 섬진강변이 이랬노라’라고

증언해야 할 의무가 내게 생겨버렸다.

달빛과 달빛을 흔들어대는 강물,

밤에도 노랗게 흔들리는 금계국꽃길, 새하얀 띠꽃길

작은 소리로 흐르는 강물

뚝방에 앉아 늦도록 내 의무를 다한다.

거기다 거의 보름달 아래 드문거리는 별까지 증언해야 한다.

달이 먼저 백운산 뒤로 넘어가며 잠들었다.

그 현란한 꽃들이 흔들렸다고

아무도 말해 주지 않는다면 저 꽃들이 얼마나 슬플까?


섬진강 뚝방의 달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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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한 사람이 드디어 나타난다.

할머니다.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도 사람이 고팠다.

내 인사를 잡고 나를 따라 걸으며 곧장 말을 이어간다.

이곳 토박이며 화개장터에서 30년 이상 온갖 잡품을 팔았단다.

땅도 사고 집도 사고 돈도 많고 아이들은 출가시키고 그저 이렇게 편안하단다.

섬진강변은 사시사철이 아름답고 늘 강바람이 불어 시원하단다.

할머니가 명함까지 있다.

곧 그만두겠지만 아직도 화개장터에 자신의 가게가 있다고

이곳에 살고 싶으면 언제든지 본인에게 연락하라 신다.

초여름 섬진강변 꽃길이 이랬다고 증명할 분이 더 계신다.


평사리 앞 강변, 하얗고 거대한 모래밭에서 다시 맨발로 걷는다.

인천공항 활주로만큼 넓은 모래밭에서 걷고

섬진강물을 적시며 강물에서 첨벙인다.

섬진강변 어디에서 살아도 좋겠어. 정말 이사 오고 싶다.


평사리 공원 모래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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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송림에서도 안 걸을 수가 없지.

내가 맨발로 걷는 것은 어싱이 어쩌고 건강이 어쩌고 그런 이유가 아니다.

발바닥에도 감각이 있으며 발바닥에 느껴지는 느낌이 좋아서다.

가능한 몸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느끼고 싶은 거지.

느낌이 좋으면 기분이 좋아지는데 당연히 건강도 좋아지겠지.


송림을 걷다가 송림 앞에 거대하게 펼쳐지는 모래밭을 건너 강으로 들어간다.

재첩을 잡는 남자가 열심히 갈퀴질을 하고 있다.

저렇게 잡아대는데도 재첩이 있나?

엄청 많다. 얕은 물에도 재첩이 깔려있다.

손으로 주워도 금방 한주먹이 될 정도로 많이 있구나!

남자에게 다가간다. 그가 강물에 띄운 다라에 돌이랑 섞인 재첩이 쌓여있다.

굵은 건 꼬막보다 더 크단다.

재첩뿐이랴?

강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민물새우보다 열 배는 큰 커다란 새우가 몰려있다.

손으로 잡으려니 뒤꽁무니를 빼며 달아난다.

얕은 곳으로 몰았지만 결국은 한 번의 동작으로 내 손에서 벗어난다.




하동 송림 앞, 섬진강에서 재첩을 잡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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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송림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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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강을 따라 흐른다.

섬진강은 바쁘지 않다. 그저 고요히 흐른다.

그 흐름에 맞게 운전하며 강변 어디든 멈추고 싶은 곳에 멈춘다.

하동포구 아래 습지에 멈추어 갈대밭 속에 구멍을 낸 흙색의 게를 찾아내고

막 익어가는 버찌를 따 먹으며 느릿하게 걷는다.

강 하구에 걸쳐진 섬진대교를 건너면 전라남도 광양이다.


평일 망덕포구는 고요하다.

초여름이지만 강바람 때문에 시원하다.


광양 쪽 섬진강변 도로를 따라 달리다가 다시 강을 건너 하동으로 돌아온다.

강을 거슬러 구례로 오면서 어제 갔던 구례 오일장에서

주전부리며 과일이며 등등을 사려고 갔더니

거짓말처럼 그렇게 북적이던 시장에,

모든 가게가 문을 닫고 노점상도 없다.

다슬기도 유과도 꽈배기도 없다. 가게가 싹 문을 닫았다.

섬진강을 따라 구례에서 하동으로 흘러본 사람의 증언이다.


하동포구 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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