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더분한 사람

260217

by 원호연

나란 사람은 분명 취향은 명확한데 보이는 것은 특별히 없다고 할 수 있다. 겉은 수더분할지라도 내실은 굳건한 모습이 평소 지향점이다. 지향점이 너무 높으면 현실이 형벌 같아서 가끔은 그 이상을 내려놓는 연습도 한다. 그러니 때론 의뭉스럽기도 음흉하기도 한 내 모습을 사랑해야지, 내가 나인 인간으로서 충분한 삶을 꿈꾼다.


일이 바빠졌다고 해서 내가 바뀐 것은 없다. 사랑하는 글쓰기 모임을 자주 못 가질 뿐.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는 정도? 내가 어떠한 지점에서 못 견뎌하는지 스스로 알아가는 정도?


나는 여전히 나.

글을 쓰는 시간이 더 좋아졌다.

사실 요즘엔 잠을 자는 시간이 더 좋다.

저번 날 꾼 꿈에는 목련이 피어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새하얀 꽃잎들 사이로 뛰어다니던 친구들을 만난 시간이었다. 어릴 적 슈퍼마리오 게임팩과 포켓몬 카드를 교환했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이젠 꿈속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인지 그 또한 의문이다.


목련 꽃잎을 줍다 깨어나, 다시 현실을 자각하는 시간은 고통스럽다.

호접지몽, 꿈에서의 내가 진짜 나인지 현실에서의 내가 진짜 나인지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퇴근길에 화장품 가게로 곧장 들어가서, 허연 손등에 이것저것 발라보는 시간도 좋다는 것이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서랍장 속 입술에 바르는 것들이 늘어만 가고 있다. 이 정도 양이라면 입술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이다.


그러고선 언제 어디서 탑승해도 만원인 19번 버스에 몸을 구겨넣고 손잡이 하나에 그날의 짐을 다 널어놓는다. 내릴 땐 다시 그것들을 주섬주섬 등에 둘러메고, 갈아탈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내일은 꼭, 내 어깨까지 쌓여있던 서류들을 전부 종이비행기로 접어버려야지, 그러고는 나를 못살게 구는 당신들의 심장을 향해 날려버려야지 해버린다. 그 다짐 하나로 출근을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하루를 건너갈 수가 없어서.


새로 시작한 일이 이렇게 바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매일 갱신되는 낯선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회의실의 공기까지도 친밀해지고 있지만 아직 일과는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 당장 쳐내야 할 일과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이 많아서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공모사업까지 하고 나면 분명 내가 성장해 있을 거란 윗선들의 착각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기관이 생각하는 대외적인 이미지와 개인의 한계치는 분명 차이가 있다. 업무량이 많은 줄 알면서도 다시 현장으로 돌아온 나이기에 누굴 탓할 텐가.


글은 두서 있게 잘 쓰고 싶지만, 말은 조리 있게 잘 못해서 위에 써둔 그 힘듦을 마음 저 깊숙하게 꾹꾹 눌러두고 산다. 말없이도 알아주는 사람이 생길 거라는 기대도 비행기 모양으로 접어본다.


다시 꾸준히 글을 쓴다.

글만 쓰다 시간이 간다.

그걸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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