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에서 10년

스무 살의 너에게

by 비누인형

세상의 모든 것들로 살아보기로 다짐했던 스무 살의 너. 덕분에 불안했지만 두렵지는 않았던 이십 대의 날들이었다. 서른이 넘어 스웨덴으로 떠나던 그날도 두려움보다는 설렘으로 가득했었다.


'적어도 너는, 다른 무언가로 살아볼 기회를 얻었잖아'


누군가 네게 말했고, 넌 수긍했고, 그런 네가 특별하게까지 여겨졌었지. 사랑을 위해서 모든 걸 내려두고 타국으로 떠나는 일이 분명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은 아니니 말이다.

쭉쭉 뻗은 나무와 야생 블루베리로 가득한 숲, 손에 잡힐 듯 낮은 하늘과 가든에서 익어가던 바비큐, 해가 지지 않는 밤이 황홀했던 그 해의 여름. 10월에 찾아온 첫눈과 밤하늘에 넘실대던 오로라, 동화처럼 예쁜 크리스마스, 4월까지 녹지 않는 눈마저 즐거웠던 그 해의 겨울. 여행자의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시간은 그 정도였던 것 같다.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그렇게 1년.


모든 이국적이던 것들이 익숙해져 생활이 됐고 낭만적인 눈이 돌아다니기에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었을 그즈음에 고민이 시작됐지. -----일! 무엇을 할 것인가. 하지만 선택지라는 건 없었다. 이미 서른이 넘었지만 이곳에서 너는 말하지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았으니까. 그때 넌 이민이라는 것이 이전 삶의 연장이 아니라 인생이 통째로 재부팅되는, 제로세팅과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불안하고 한심한 날들이었다. 더 이상 생산적이지 못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널 괴롭게 했지. 쉬지 않고 달려온 삶에 틈이 생기면 가장 먼저 스며드는 감정은 외로움이었다. 틈이 크고 깊어지면 외로움은 슬픔이 되기도 하고 후회가 되기도 하고 또 공허함이 되기도 하더라. 하지만 또 신기하게도 잠깐씩 찾아오는 쨍한 햇살이나 시원한 바람, 길가에서 마주치는 이름 모를 꽃들에 그 모든 무거운 감정들이 싹 사라져 버리곤 했다. 눌려 죽을 것 같은 우울이 꽃 하나에 가볍게 날아가 버리다니. 그래. 어디에 있든 삶은 늘 그랬다. 온갖 신나는 일들로 가득한 하루일지라도 집으로 돌아가는 텅 빈 지하철이나 누군가의 축 처진 어깨에서 문득 삶의 무게를 느끼며 새침해지기도 하니까. 완벽히 기쁜 하루나 완전히 슬픈 하루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그런 면에서 그즈음에 너의 증폭된 감정들이 네가 고국을 떠나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건 매우 중요했다. 이곳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누구도 탓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지. 너의 하루하루가 사랑하는 사람을 탓하는 시간으로 채워지거나 그로 인해 사랑이 변질된다면 너의 삶에는 무엇이 남게 될까.


언어를 배우고 공부를 하고 애를 낳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니 10년이 흘렀다.

많은 사람들이 해외에 사는 건 어때?라고 묻는다. 결혼이민이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 고생 없이 여행이나 하면서 사는 특급열차인 것처럼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너는... 어때? 행복하니?


나는 별로 걱정이 없다. 하루하루가 가볍고 단순하지만 그렇다고 만족스럽지는 않다. 남편과 아이, 셋이 있어 좋지만 여전히 나는 내가 한 발로 선 채로 두 팔은 남편의 어깨를 붙잡고 그의 삶에 매달려 있는 존재라고 느낄 때가 많다. 그의 부재가 발생했을 때 나는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가 없는 반쪽의 연금으로 노후는 안전한가? 그의 친구를 제외한 나만의 친구는 몇이나 되지? 당장 각종 공과금과 보험은 스스로 처리할 수 있을 정도인가?

10년을 걸어서 한국과 스웨덴의 어느 중간에 서 있는 기분이다. 한국인과 있으면 그대로 현지인과 있으면 또 그대로 늘 중간 어디쯤에 머물러 있다. 10년이 긴 시간은 아니지만 익숙했던 것들이 잊히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이곳이든 저곳이든 똑같이 즐겁기도 힘겹기도 한 삶이다. 계속되는 시간 속에서 또 한 번 10년이 지나면 나는 애매하지 않은 어느 한 곳에 서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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