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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누인형 Nov 20. 2024

프랑스 소도시: 랭보에게로

나의 방랑 : Charleville-Mézières, France

심장이 뛰었다.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믿을 수 없을 만큼 벅차게 심장이 뛰었다. 그래서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았다. 오랫동안 숙제처럼 간직해 왔던 그곳으로 이제는 가야만 했다. 

랭보를 알게 된 건 열여섯 쯤 되었을 것이다. 토털 이클립스라는 영화로 처음 알았고 그가 궁금해서 시를 찾아 읽었다. 다락방에 갇혀 탈출을 상상하며 시를 썼던 사내아이. 방랑의 언어로 채워진 시들과 그의 인생에 매료돼 랭보처럼 살리라, 세상의 모든 것들로 살아보리라 다짐했었다. 나의 떠남에 매번 이유가 돼주었고 매번 불안하지만 두렵지 않았던 이유 역시 그였다. 


숙제처럼 간직해 왔던 그의 고향으로 가는 길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가을이 깊어가는 들녘은 단풍이 우거지고 사시사철 푸른 초원에서 풀을 뜯는 흰 소들이 한가로이 흩어져 있었다. 심심한 평야에 크지 않은 굴곡진 언덕배기가 만들어내는 변화가 이국적으로 다가왔다. 


샤르빌에 도착했을 때 첫 느낌은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마 랭보가 살던 200년 전에도 이 모습 그대로였으리라. 반듯한 돌길과 그 사이를 빼곡히 채운 옛 건물들은 단출했지만 멋스러웠다. 

말 그대로 샤르빌은 랭보의 도시였고 그의 이름을 딴 서점, 이발소, 빵집, 학교, 일반 회사까지... 어딜 가나 그의 얼굴과 시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제거한 이 도시의 인상을 말하자면 -멋스러운 도시의 모습과는 별개로- 조용하고 없이 돌아가는 세상 어디에나 있는 흔한 작은 도시, 심심함과 단순함이 랭보를 멀리로 이끌었을지도 모르겠다. 


불어로 채워진 랭보박물관의 글귀를 하나하나 번역기를 돌리며 훑어보고 그가 살았던 곳에서 멍하니 앉아 있어도 보고 그가 걸었을 거리를 가로질러 그의 무덤까지, 이틀을 온통 그의 생각으로 채웠다. 나의 십 대와 이십 대의 많은 시간을 지배했던 그 이름, 참 무거웠던 삶이란 글자를 내려놓고 조금은 가볍게 살자 다짐할 때까지 내 모든 방황과 방랑의 이유가 돼주었던 랭보라는 사내.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이름에 다시 심장이 뛰었던 이유는 뭘까.


근래 나는 '방향'을 잃었다. 이민을 떠난 지 10년이 됐고, 그 10년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방식과 아주 달랐다. 제로세팅된 삶을 채워 넣기 위해서 말 그대로 채우기 위한 삶을 살았다. 알파벳부터 다시 배워야 했던 언어, 낯선 사회에 떨어진 나는 유치원생 아이처럼 무지했지만 이미 서른을 넘은 나이였기에 무엇이든 해야 했고, 생산성 없는 존재에 대한 하찮음이 늘 스스로를 괴롭혔다. 구멍을 메우며 살다 보니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삶에 대한 의문이 고개를 쳐든다. 스물의 어느 언저리에 묻어 두었던 무겁디 무거운 고뇌. 끝은 없겠지만 적어도 이제는 제대로 마주 봐야 하지 않을까, 삶, 그 어렵고 무거운 단어.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19살에 절필을 하고 직접 세상을 보고 체험하기 위해 여행을 시작했던 랭보는 그곳에서 무언가를 찾았던 걸까. 11년 간의 타지 생활 동안 그가 적어 보낸 편지는 대부분 불평과 불만이었고 나머지는 이국적인 자연과 새로운 관심사에 대한  흥분이었다. 탐험가이자 사진작가, 채석장 감시원, 밀수업자... 수많은 직업으로 살았던 그는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 속에서 희망했던 삶을 살았던 걸까. 아니면 자신이 썼던 수많은 시를 부정할 만큼 세상에 스며든 걸까. 


여전히 대답도 방향도 찾지 못한 채로 샤르빌을 떠나면서 오랫동안 이곳을 찾지 못했던 이유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나의 마지막 보루. 절실하지 않은 바람이나 무겁지 않은 고민을 들고 이곳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이곳을 계기로 다시 시작된 나의 무겁고 오래된 고민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 것이다. 이제는 피하지 말자. 접어 두지도 말고. 그저 앞으로 남은 프랑스 여행동안 힘껏 간소화해 보자. 



나의 방랑 생활 


난 쏘다녔지, 터진 주머니에 손 집어넣고,

짤막한 외투는 관념적이게 되었지,

나는 하늘 아래 나아갔고, 시의 여신이여! 그대의 충복이었네

오, 랄라! 난 얼마나 많은 사랑을 꿈꾸었는가!


내 단벌 바지는 커다란 구멍이 났었지,

---꿈꾸는 엄지동자인지라, 운행 중의 각운들을

하나씩 떨어뜨렸지, 내 주막은 큰 곰자리에 있었고

---하늘에선 내 별들이 부드럽게 살랑거렸지


하여 나는 길가에 앉아 별들의 살랑거림에 귀기울였지,

그 멋진 구월 저녁나절에, 이슬방울을

원기 돋구는 술처럼 이마에 느끼면서,


환상적인 그림자들 사이에서 운을 맞추고,

한 발을 가슴 가까이 울린 채,

터진 구두의 끈을 리라 타듯 잡아당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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