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게으른 완벽주의자들에게

P에서 J가 되기까지

by 은시

나는 천성이 P였다. 즉흥적으로 계획한 해외여행에 비행기 티켓만 구매하고선 준비를 마쳤다고 말하던, 워킹홀리데이로 생전 처음 가보는 뉴질랜드에 미리 숙소도 구하지 않고 도착 후에야 집을 보러 다녔던 과거의 내가 그 증거이다.


요즘 성격유형 검사인 MBTI가 유행을 하면서 인간을 고작 16가지의 유형에 꾸역꾸역 집어넣어 정의하는 것이 추세이다. 나도 그것을 맹신하진 않지만 아주 과학적이지 않은 소리는 아닌듯하여 가끔 아, 이 사람 역시 F였구나 싶은 정도로만 믿고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영원히 바뀔 것 같지 않던 내 MBTI가 대변신을 하였다. 태어나길 게으른 인간이던 나는 2번의 직장생활 끝에 ‘게으른 완벽주의자’에서 ‘자본주의적 계획형 인간’으로 탈바꿈했다. 게으른 완벽주의자는 뭐고 자본주의적 계획형 인간은 또 무엇인지.


할 일 미루기가 특기이자 습관인, 그러나 그 이유가 아주 게을러서가 아니라 당장의 나는 이 일을 엉성하게 마무리할 것이 뻔하기에 후에 더 발전한 내가 100점짜리 완벽한 결과물을 내리라 믿고 지금 그 일을 하지 않는 인간을 게으른 완벽주의자라 칭한다. 나는 이러한 유형의 사람이었다. 내 평생 계획표의 ㄱ자와도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초등학교 때 여름방학 숙제 중에서 ‘방학 계획표 짜 오기’를 울며 겨자 먹기로 했던 그런 난데, 어쩌다 23년이나 살고 난 지금에서야 계획형 인간으로 바뀌었을까. 그것은 실로 자본주의가 가져다준 결과물이었다.


흔히 카페 알바생이나 연예인에게서 ‘자본주의 미소’를 발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지극히 평범한 회사원에게도 자본주의적 행동 패턴이 존재한다. 예컨대 점심시간엔 팀장님 밥 먹는 속도에 맞춘다던지, 상사의 관심 없는 이야깃거리에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질문을 해댄다던지. 나에게도 회사에서만 하는 여러 행동이 존재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시키지도 않은 모든 일에 계획 세우기이다. 인간의 기억력은 하찮아서 적어놓지 않으면 금세 잊어버린다. 그러니 그 중요한 기념일을 정작 당일에 깜빡하거나 당장 지난밤 사이 꾸었던 꿈조차 낮이 되면 도통 생각이 나질 않는 것이다. 사적인 일에서야 괜찮을지 몰라도 회사에서 자꾸 무언갈 까먹고 못하게 되면 문제가 된다. 능력 부족한 사원으로 낙인찍힐 것이고 며칠 내내 자책의 늪에 빠져 시달리게 될 것이다. 본인의 이야기다. 그렇게 몇 번의 쓴 맛을 보고 난 후 나에게는 아주 사소한 것 하나까지 적는 메모 습관이 생겼다. 손바닥만 한 수첩을 준비해놓고 사수의 말 한마디 한 마디를 모두 받아 적는 것이다. 설령 그 말이 너무 당연하여 절대 잊을 리 없을 거라 생각해도 말이다. 왜냐하면 이제는 알기 때문, 나는 내 생각만큼 똑똑하지 않고 10개를 들으면 그중 하나는 분명히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오늘 해야 할 일(TO DO LIST)이나 앞으로 한 달 동안의 계획표를 세우는 것 등이 나의 습관이 되었고 이제 그 ‘모든 일에 계획 세우기 습관’은 비단 회사에서 뿐 만이 아니라 ‘사적인 나’까지 지배해버렸다. 친구들과의 모임 약속을 하나하나 기록하고 계획을 짜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소비패턴도 모르던 내가 이젠 다음 달 지출 계획을 위해 매일 가계부를 쓴다.


이렇게 지극히 사회적으로 정형화된, 그저 평범한 보통의 직장인 A 씨가 되어버린 내가 썩 싫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마음에 든다. 어릴 땐 나의 모습이 변하면 개성을 잃는 것인 줄 알고 두려워했었는데 사실 그것은 나를 잃는 것이 아닌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 게으르지도 않고 완벽주의자도 아니다. 그래서 이제는 결과물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미완이고, 100점짜리는 아닐지라도 오늘 이 일을 마치면 어쨌든 80점짜리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다. 20프로 모자르다 한들 신경 쓰지 말자. 0점짜리 백지의 답안보다는 당연히 나을뿐더러 언젠가 만점짜리의 만족스러운 아웃풋을 얻게 될 것이기에.


‘어른이 되면 다 이렇게 돼. 나도 그땐 자주 덜렁댔어.’ 세상 계획적이고 꼼꼼한 성격의 친한 언니가 하던 말이다. 어른 같은 어른들을 우러러보던 그 시절의 나도 이제는 제법 어른이 되었나 보다.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성장해 나가는 중임을 몸소 느낀다. 고집스럽게 푸르던 여름 나뭇잎이 어느새 수줍게 붉은 물이 들듯, 변치 않을 것 같던 많은 것들이 변해가는 가을이다. 그렇게 올해도 어김없이 흘러가는 것들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의 일기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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