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지 말았어야 했던
도서관에서 과제하던 도중 울린 진동음, 예상하지 못했던 이의 전화였다. 예상을 못했기에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알았다면 받지 않았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나와 끊긴 전화를 다시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음성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통화 가능하느냐는 물음에 나는 계단 옆 난간에 몸을 기대 고선 나지막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간단한 안부로 운을 뗀 음성은 곧바로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 내용은 지난날의 나와 도수의 대화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 도수와 이 얘기를 했던 게 언제였던가라고 생각을 거슬러 올라갔다. 오래 걸리진 않았다. 그건 바로 어젯밤이었다. 도수는 그 사이에 나와의 대화를 전한 모양이다. 내가 수화기 너머로 들은 대화는 왜곡되고 오염된
채였지만,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말하던가요?" 내가 물었다. 지긋한 소리로 돌아오는 대답은 "그럼 아니냐"였다. 참으로 고루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고개를 위로 올려다본 하늘은 햇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칙칙한 묵색이었다. 지금 기분이 딱 그러했다. 이 통화를 이어가도 내겐 별 수확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굳이 나를 이해시키려는 헛된 노력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지만 순순히 그들의 말이 맞다고 맞장구 쳐줄 순 없었다. 난 그가 모르는 나와 도수의 사정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자세한 설명을 할수록 피곤해지니 어물쩡 넘어가는 게 차라리 속이 편했다. 그는 결국 '그래, 네가 똑똑하니까 알아서 잘하겠지'라며 나를 비꼬고선 한숨을 턱 내쉬곤 통활 끊었다.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일정하게 반복되는 통화음을 들어야 했다.
도수는 쪼잔하며, 열등감에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인간군상 중 하나였다. 그가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내뱉고, 나를 협박했던 나날들을 난 잊지 못한다. 제 분에 못 이겨 물건을 내게 던지고, 내 목을 졸라 죽이려 했던 그날 밤을 난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그런 그가 하는 짓이 내가 그의 기분에 어긋나는 대답을 했다고 누군가에게 곧바로 이르는 행위에 기가 막히고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걸 전한다고 내게 전화한 그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내 인생은 왜 이리도 기구할까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아니면 인복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걸 수도 있겠다. 내가 성취해놓은 모든 일들 망치려는 이들이 주위에 온갖 널렸으니. 차라리 모든 연을 끊고 혼자 살아갈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내겐 그것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모양이니
이젠 울 수도 없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 없다. 그러기엔 내가 너무 강한 에고를 가졌다. 꼭두각시처럼 그들이 듣기 좋은 대답을 해주기엔 내가 인형이 아녔다. 덕분에 기분만 나빠졌다.
무소식이 희소식이 듯,
어떤 연락은 받지 않는 게 더 좋을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