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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만찬 Aug 30. 2021

"남자가 부엌에들어가는 거아니야!"

라고 할머니는 아버지께 아직도 말씀하시고, 나는 음식을 한다.

아버지와 일 년에 한 번은 찾는 대전의 국밥집, 새벽에가면 택시기사 아저씨들과 함께 소주를 마실수 있다.

빙상 위의 요리사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은 아버지가 음식을 자주 하셨었다,  요리사가 되고자 작은 꿈을 시작했던 기점도 확실하게 어떠한 일 이후였다고 나는 지금도 감히 말할 수 있는 날이 있다. 

 내가 꼬맹 이때 아버지는 낚시를 사랑하셨다. 출근 전 오전 시간을 활용해 수영을 하러 집 근처 종합체육관을 다니며, 주말에는 산책을 나가듯 근교 강가로 낚시를 다니셨었다. 나는 그때 당시 초등학생쯤이나 되었을까,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하루 종일 놀고 구정물 범벅이 되어 노을질 저녁쯤 집에 들어와 모든 학습지를 제쳐버리고 밥을 먹고 기절해버리는 나날들을 보냈었던 것 같다. 

 거의 달마다 표시해두었던 냉장고 옆면 기둥에는 엎드려놓은 빼빼로처럼 가느다란 볼펜으로 그어놓은 선분과 날짜가 빼곡하게 적혀있다. 내가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볼펜으로 그어둔 선분들이 늘어나면서 나는 아빠와 함께 낚시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사실은 아빠가 무엇을 그렇게 좋아하시는지 나만 빼고!라는 심정으로 쫓아 갔던 기억은 선명하다.

어린 나는 기다림을 몰랐다, 아니 기다림이 뭔지 몰랐다. 그리고 그 후에 오는 '물고기'라는 보상이라는 것은 '니모를 찾아서' 혹은 'Why?' 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것이었고 말이다.

그렇게 줄곧 몇 번을 따라다니다가 겨울이 되었고, 가족들과 다 함께 어머니의 고향인 홍천에서 빙어낚시를 갔었었다.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는 그날은 무척이나 추웠고 동생은 엄마품에 안겨서 아빠와 아들이 빙어를 잡아 올리길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추운 날에는 우리들의 몸도 체온을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 열심히 칼로리를 태워내고 그리고 우리는 '배고픔'이라는 것을 얻는다. 내가 중학생이나 되었을 때일까 그때도 한참 잘 먹는 퉁퉁이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던 까닭에 금방 배고픔을 느꼈었다. 그때 아버지는 검은색 서류가방 (부탄가스버너)를 꺼내더니 불을 피우고, 잘게 썰어놓은 감자, 대파, 당근 등의 야채를 넣고 고추장을 듬뿍 넣으시더니 '짜잔'과 함께 연기 나는(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고추장찌개를 끓여오셨다. 빠글빠글 끓어오르는 붉은 찌개국물과 카레처럼 뭉근하게 잘 익은 야채까지. 보온 도시락에 싸온 아침밥을 가장 추운 겨울 빙판 위에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함께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기억이 나고 코끝이 찡- 하는 이유는 아마 사랑 때문이었고, 아버지라는 사람의 뒷모습 때문이었다. 가족을 위해, 함께할 시간을 위해, 따뜻한 국물을 위해. 


18년 전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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