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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니와 알렉산더 Jan 12. 2024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희망과 야심이 기록된 페이지와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 사이에 서서

이대로 늙어버리고 말까봐 두렵다. 

이대로 어영부영 살다가 내 꿈들을 이루지 못한 채 무기력한 중년이 되어버리고 말까봐 두렵다. 

언젠가부터 환멸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멸이 나를 자주 찾아오는 게 온전히 나의 탓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없다.

세상은 객관적인 사실로서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들은 결국 운명 앞에서 나약한 개인을 다룬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따르면, 비극의 주인공은 사회 평균인보다 고귀한 인물이어야 한다.

하마르티아(hamartia).

성격적 결함이나 순간적인 판단 착오. 

그리스 비극은 위대한 인물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하마르티아로 인해서 몰락하는 이야기로 규정할 수 있다.


가장 유명한 비극의 주인공인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 비극은 찰스 비더의 '길다'(1946)와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1979)부터 박찬욱의 '올드보이'(2003)에 이르기까지 많은 후대의 예술작품들에 원형적 서사를 제공했다.


오이디푸스는 조선의 세종에 비견될 수 있을, 테베 역사상 최고의 임금이었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맞춘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인물이기도 했다.

이 위대한 인물을 몰락시킨 건 델포이 신전에서 받은 신탁, 즉 운명이었다. 


운명의 이러한 파괴적 위력을 두려워하면서도, 나는 운명을 결코 이길 수 없는(invincible) 상대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간을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라고 규정한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운명 역시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생애의 많은 영역에 작용하는 운명의 강력한 힘은 여전히 공포스럽다.

나의 꿈을 향해 쏘아올린 화살들.

그동안 얼마나 많은 화살들이 운명의 벽에 부딪혀 부러지고 말았던가.


운명이 환멸의 아버지라면, 환멸의 어머니는 누구일까?

인간 개개인이 환멸을 낳는다.

나는 왜 환멸을 느끼는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면서도,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면서도 행동하지 않았다.

잎새를 위해 바람을 막아준 적 없는 삶이 부끄럽다.

세상을 바꾸고 힘없고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아직까지 그러한 사람이 되지 못한 나는 환멸을 느낀다.


그동안 행동하지 않았던 건 나의 오만 탓이다.

내가 평생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이 오만이다. 

휴브리스(hubris). 오만.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y)가 문명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대중은 그들이 제시하는 모범을 따른다.

이것이 모방, 즉 미메시스(mimesis)다. 

토인비는 문명의 흥망성쇠를 '도전과 응전'(challenge and response)의 틀로 분석했다.

창조적 소수가 휴브리스로 인해서 도전에 적절하게 응전하지 못할 때 문명은 퇴락한다.

인간의 오만이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인간 실격'의 첫 두 문장을 기억한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나도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다.

나도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나를 믿는다.

나는 여전히 나의 꿈들을 믿는다.

나는 칸 영화제에서 나의 영화가 상영되는 꿈을 꾼다.

나는 불행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이 나라의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들을 돕고 싶다. 


나를 사랑해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서 더이상 "오늘만 대충 수습하면서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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