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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니와 알렉산더 Jan 17. 2024

나는 이상한 사람은 맞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야!

드라마 '웬즈데이' - 한나 아렌트가 팀 버튼과 만날 때

소수자의 정서에 깊이 공감한다. 나의 이러한 공감은 꽤나 이상하다. 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줄곧 사회의 주류에 속한 채 살아왔기 때문이다. 더 이상한 것은 내가 소수자의 정서에 공감할 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를 소수자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왜일까? 어릴 때부터 친구가 없는 시기가 길었는데, 고독의 시간이 그러한 인식을 만들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이상한 것에 끌린다. 이러한 취향은 나의 소수자성의 원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강화하는 요소인 것만은 분명하다. 예술의 영역에서도 나는 이상한 작품이 좋다. “There is no exquisite beauty without some strangeness in the proportion.” 이상함이 얼마간 들어있어야 찬란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에드거 앨런 포의 이 말을 나는 좋아한다. 


소수자로서의 자기인식과 기이한 예술작품을 좋아하는 취향을 지닌 내가 팀 버튼 감독을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내가 그의 팬이 된 것은 필연적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는 자신의 이상한 영화에서 이상한 소수자의 이야기를 전한다. "It's good as an artist to always remember to see things in a new, weird way." 사물을 새롭고 이상한 방식으로 보는 걸 항상 기억하는 것은 예술가로서 좋은 것이다. 팀 버튼 감독의 말이다. ('가위손', '에드 우드', '빅 피쉬', '유령신부'도 올해 다른 글에서 다룰 것이다.)


(나는 작년부터 단비다이브라는 뉴스레터에서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다. 에디터로서의 나의 필명이 '서교동 팀버튼'이다.)


작년에 - 2023년이 작년이라니! - 가장 좋아했던 드라마가 둘 있다. '더 글로리'와 '웬즈데이'(2022년 11월 23일 공개)다. '웬즈데이'는 팀 버튼이 제작에 참여하고 1화부터 4화까지 연출한 넷플릭스 8부작 드라마다. '웬즈데이'는 '아담스 패밀리'의 스핀오프 드라마다. '아담스 패밀리'는 찰스 아담스(Charles Addams) - 만화가의 성이 아담스다 - 가 잡지 뉴요커(The New Yorker)에 연재했던 만화에 처음 등장했다. (참고로, 찰스 아담스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친구였다고 한다. 히치콕의 1959년작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는 친구 찰스 아담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너희 세 명. 찰스 아담스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네.") 아담스 패밀리는 1964년부터 1966년까지 ABC방송에서 방영된 드라마 '아담스 패밀리'를 비롯해 여러 번 드라마나 영화, 애니메이션 등으로 각색되었다.


'아담스 패밀리'의 장녀 웬즈데이 아담스는 동생 퍽슬리를 괴롭히는 학생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들이 수구(water polo)를 하는 수영장에 피라냐를 풀어 넣는다. 그녀의 부모는 학교에서 퇴학된 웬즈데이를 자신들이 인연을 시작한 곳이자 자신들의 모교에 입학시킨다. 그곳은 버몬트주 제리코에 위치한 '네버모어 아카데미'. (찾아보니 제리코는 실존하는 마을이다. 인구 5천 명의 작은 마을이더라. 애초에 버몬트주 자체가 인구 64만 7천 명의 주로, 인구 순위가 미국 50개주 가운데 49번째다.) 벽지에 있는 '네버모어 아카데미'는 '별종'(outcast) - 확인해보니 우리나라에서는 별종으로 번역했던데, outcast는 '사회에서 거부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 들이 다니는 학교다. 항상 고스룩(gothic fashion) - 검은 머리와 옷으로 대표되는 패션 - 으로 다니는 웬즈데이는 다재다능하고 천재성과 환영을 통해서 과거의 사건을 경험하는 초능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녀는 염세주의자이고 친구를 배척하는 '아싸'다. 웬즈데이가 네버모어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 주위 친구들과 우정을 쌓아 나가고 자신의 부모의 비밀을 파헤치며 '네버모어 아카데미'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키는 것이 '웬즈데이'의 서사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주창한 개념이다. 1963년 출간된 그녀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의 부제가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다.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주의깊게 관찰하며 아렌트는 악의 근원은 사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사유(thoughtlessness)가 악을 낳는다. 여기서 사유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타인의 입장을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지 못하고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하지 않을 때 평범한 사람들이 악인이 된다는 것이다. 


1906년 독일 하노버에서 태어난 아렌트는 유대인이었다. 그녀는 '존재와 시간'으로 유명한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 아렌트는 자신의 스승인 하이데거와 연애를 하기도 했다 - 와 역시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인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 야스퍼스는 '실존철학'이라는 말을 조어한 철학자다 - 문하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나치 시대에 그녀는 프랑스로 피신하고, 이후 독일이 파리를 점령하자 미국에 망명한다. 1967년부터 197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렌트는 뉴욕에 위치한 뉴스쿨(The New School)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쳤다. 


아렌트는 outcast였다.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으로서 살아갈 수 없어서 프랑스로 망명했다.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아렌트는 다시 미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자신의 소수자성으로 인해서 사회에서 배제되고 이방인으로서 살아가야 했던 생애사적 체험은 그녀의 철학의 뿌리가 되었다. 


다시 웬즈데이. 주류 사회에서 별종들을 배제하고 그들을 말살하려고까지 하는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별종들을 배척한다. 팀 버튼의 전작 '유령신부'(2005)에서도 빌런은 주인공 빅터가 저승에서 만나는 괴이한 모습의 유령들 속에 있지 않았다. 평범해 보이는 인간이 빌런이었고, 겉으로 무섭게 보이는 유령들은 선한 인물들이었지 않았나.


“타인의 슬픔에 대해 ‘이제 지겹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혹한 짓이다. 그러니 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슬픔에 대한 공부일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신형철 평론가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잔인해지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사유하고 공부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사회는 문명사회다.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고 배척하는 사회는 야만사회다. 토마스 홉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서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은 사회를 만들지 않았던가? 우리 사회가 문명사회인지, 야만사회인지 묻고 싶다. 


나는 문명사회라는 답을, 선뜻 하지 못한 채 망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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