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딪혀야 빛난다.

by 혜수


특별한 시간이면 노을을 보러 떠난다. 특히 바다에서 보는 한 해의 마지막 일몰과 새해 첫 일출은 내게 의미 있는 의식이다. 일 년의 마지막 날, 가족과 함께 바닷가에서 지내며 한 해를 돌아본다. 새해 첫 햇살을 맞으며 새로운 다짐도 한다. 그런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에 깊은 감사를 느낀다.

노을이 붉게 보이는 이유는 빛의 산란 때문이다. 지구의 대기를 통과하는 빛은 대기 중의 분자나 작은 입자들과 부딪혀 흩어진다. 이때 빛의 파장에 따라 분산되는 정도가 다르다. 짧은 파장의 푸른빛 보다 긴 파장의 붉은빛은 덜 산란된다. 그래서 낮 동안에는 하늘이 파랗게 보인다.

일출과 일몰에는 상황이 다르다. 태양이 지평선 가까이 내려앉으면서 햇빛은 대기를 더 긴 경로로 통과한다. 그 과정에서 푸른색 계열의 짧은 파장의 빛은 점차 사라지고, 결국 우리 눈에 닿는 것은 긴 파장을 지닌 붉은빛이다. 노을은 부딪혀 흩여지면서도 하늘에 오래 남은 빛들의 최초이자 최후다.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인생의 처음과 마지막을 함께 할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이다. 탄생을 부모가 맞이하고 부모의 임종을 자식이나 사랑하는 이가 맞이하듯, 어쩌면 일몰과 일출은 인간의 삶과 비유할 수 있겠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노을을 보는 건 의미 있고 소중한 일이다.

노을이 좋다. 그래서 노을 그림도 자주 그린다. 그림을 그릴 때면 하늘에 연보라색, 살구색, 분홍색 물감이 곱게 풀어진 그 풍경에 마음이 사로잡힌다. 노을이 내 마음을 울리는 또 다른 이유는 그 짧은 순간이 인생과 닮았기 때문이다. 노을의 찬란한 빛깔은 지구와 대기, 빛의 길이라는 여러 가지 요소가 얽혀 만들어낸 조화이다. 흥미롭게도 공기가 너무 맑은 곳보다는 대기 중에 먼지나 물방울, 오염물질 등이 섞여 있을 때 더욱 화려하게 빛난다.

미국의 세인트헬렌스 화산 폭발 이후에, 미세 먼지가 떠다니며 전 세계의 하늘을 유난히 화려하게 물들였던 일화가 있다. 인도네시아의 크라카토아 화산 폭발 후 하늘이 짙게 물들어 뭉크가 <절규>라는 작품을 탄생시켰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인생도 역경과 고난 속에서 더 빛나며 깊이 있는 아름다움을 얻는다. 대기 속의 먼지가 노을을 화려하게 만드는 것처럼, 삶의 시련은 우리의 인생을 더 다채롭게 채워준다. 뜻밖의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그 과정을 통해 얻는 불완전한 아름다움이 진정한 깊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주인공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지만, 여러 시련을 견디며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을 깨닫는다. 친아버지의 삶의 마지막 순간에 벤자민이 아버지를 엎고 달려간 곳은 그가 노을을 감상하던 곳이다. 노을을 보며 마지막을 함께 한 그 장면이 아직도 인상 깊다. 나도 인생의 마지막 노을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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