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그날 이후로 나는 자꾸 서윤의 표정을 살피게 됐다.
도서관에서 마주 앉아 있을 때도, 학생회관 앞 계단에 같이 앉아 있을 때도, 심지어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조차 나는 그녀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혼자 오래 생각했다. 전 같으면 웃고 넘겼을 말 하나가 자꾸 걸렸고, 별것 아닌 침묵에도 괜히 의미를 붙였다.
좋아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확신도 함께 커지면 좋았을 텐데, 내 경우엔 반대였다.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서윤은 여전했다.
다정했고, 내가 무심코 흘린 말도 잘 기억했고, 먼저 내게 연락을 해오는 날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좋으면서도 의심했다.
나한테만 그런 건 아니지 않나, 원래 누구에게나 다정한 사람이지 않나, 내가 괜히 혼자 앞서가고 있는 건 아닌가. 그렇게 몇 번이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또 가까워지고 싶어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마음이었다. 다가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쪽이 먼저 한 걸음 내딛으면 되는 건데, 그때의 나는 그걸 몰랐다. 아니, 알았어도 못했다.
첫사랑이라는 말은 예쁘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내게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찌질하고, 초조하고, 혼자 상처받기 쉬운 일이었다.
5월이 시작되면서 학교 풍경도 조금씩 달라졌다.
벚꽃은 거의 다 졌고, 대신 나무들이 연둣빛으로 짙어졌다.
바람은 전보다 따뜻했고, 캠퍼스에는 시험이 끝난 사람들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부쩍 많아졌다.
축제 준비를 하는 동아리들이 본관 앞에 천막을 세우기 시작했고, 학생회관 게시판에는 공연 포스터와 주점 안내지가 덕지덕지 붙었다. 처음 봄이 왔을 때의 들뜸과는 또 다른 종류의 소란이었다.
그 무렵 서윤은 유난히 바빠 보였다.
같은 과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도 많아졌고, 조별 과제나 과 행사 준비 때문에 정신이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 예전처럼 도서관에서 길게 함께 있는 날은 줄었지만, 대신 짧게라도 자주 마주쳤다.
강의실 앞 복도에서, 자판기 앞에서, 학생회관 계단 아래에서. 그럴 때마다 서윤은 늘 먼저 웃었다.
“오늘도 도서관?”
“응. 너는?”
“나 축제 회의. 살려줘.”
그 한두 마디만으로도 나는 금방 기분이 풀렸다. 내가 얼마나 단순한 사람인지 새삼 알게 되는 순간들이었다. 혼자 서운해하다가도 그녀가 평소처럼 웃어주면 그동안 쌓아 둔 감정이 거짓말처럼 가벼워졌다.
그런데 그런 순간이 반복될수록 오히려 더 견디기 어려워졌다.
나는 점점 분명해지고 있었고, 이 상태로는 오래 못 버틸 것 같았다.
결정적인 계기는 아주 사소했다.
어느 저녁,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나오는데 서윤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지금 어디야?”
나는 괜히 걸음을 멈추고 바로 답했다.
“도서관. 왜?”
“학생회관 뒤편 잠깐 와줄 수 있어?”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도 심장이 먼저 뛰었다.
학생회관 뒤편에는 축제 준비용 자재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고, 몇몇 학생들이 현수막을 들고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그 한쪽에서 서윤이 큰 종이박스를 붙잡고 서 있었다.
머리카락은 바람에 조금 흐트러져 있었고, 소매는 팔꿈치 위까지 걷혀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안도한 얼굴로 웃었다.
“다행이다.”
“왜, 무슨 일 있어?”
“이거 좀 같이 옮겨줄래? 애들 다 잠깐 자리 비워서.”
나는 대답도 하기 전에 박스 한쪽을 잡았다.
안에는 축제 부스에 쓸 일회용 컵이랑 냅킨 같은 게 가득 들어 있었다. 생각보다 가벼웠지만, 우리는 괜히 둘이 낑낑대는 척하며 창고 쪽까지 옮겼다.
박스를 내려놓고 나니 서윤이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웃었다.
“너 아니었으면 진짜 혼자 울었어.”
“그 정도는 아닌데.”
“아냐. 오늘 하루 종일 이런 것만 들고 다녔어.”
나는 그녀가 건네준 생수병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해는 거의 다 져가고 있었고, 학생회관 뒤편으로 길게 그림자가 내려앉고 있었다.
멀리 운동장 스피커 점검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서윤은 박스 위에 잠깐 걸터앉아 두 손으로 생수병을 감쌌다.
“근데 너 요즘 진짜 바빠 보이더라.”
내가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축제 끝나면 나아질 것 같아.”
“힘들겠다.”
“그래도 재밌어.”
말끝이 잠깐 비어 있었다. 서윤은 내 쪽을 보다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가끔은 네가 안 보여서 좀 심심했고.”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장난일 수도 있었고, 진심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늘 그런 말들 앞에서 멈췄다.
좋으면 그냥 좋다고 받아들이면 될 텐데, 혹시 나만 다르게 듣는 건 아닐까부터 생각했다.
그래서 겨우 이렇게만 말했다.
“나도 좀 바빴어.”
서윤은 잠깐 나를 보더니 웃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그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나는 처음으로 확실히 생각했다.
이제 정말 말해야겠다고. 더 늦기 전에. 매번 애매한 표정과 침묵 뒤에 숨는 것도 지겨웠고, 무엇보다 내가 자꾸 못난 사람처럼 느껴졌다.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좋아하면서도 혼자 상처받는 쪽으로만 마음을 쓰는 내가 싫었다. 한 번쯤은 제대로 부딪쳐 봐야 했다. 잘되든 안 되든, 적어도 지금처럼 비겁하게 굴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며칠 동안 틈만 나면 고백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축제가 끝난 밤, 사람이 조금 빠지고 나면 학교 안이 잠깐 조용해질 것이다.
그때 서윤을 데려다주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해.” 그 한마디면 되는데, 막상 머릿속에서 연습하면 문장이 자꾸 길어졌다.
예전부터 좋아했다는 말, 같이 있는 시간이 좋았다는 말, 혹시 부담이면 괜찮다는 말까지. 마음은 단순했는데, 그걸 꺼내는 일은 이상하게 자꾸 복잡해졌다.
축제 첫날 밤, 우리는 의외로 오래 함께 있지 못했다.
서윤은 과 부스 쪽 일을 도와야 했고, 나는 친구들이랑 공연을 보다가 뒤늦게 학생회관 앞으로 갔다. 사람은 너무 많았고 음악은 지나치게 컸다. 화려한 조명 아래서 누가 누구랑 있는지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래도 나는 자꾸 서윤을 찾았다.
부스 안쪽에서 손님 응대를 하다가 나를 발견하면 잠깐 웃어주는 얼굴,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밥 먹었어?” 하고 묻는 말 같은 것만으로도 그날은 충분할 것 같았다.
둘째 날엔 조금 나았다.
저녁 무렵 서윤이 먼저 연락했다.
“끝나고 잠깐 볼래?”
그 문자 하나에 하루 종일 붕 떠 있던 마음이 더 심하게 흔들렸다.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었다. 그냥 힘들어서 잠깐 쉬고 싶거나, 내가 전에 빌려준 펜을 돌려주려는 걸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미 마음대로 기대하고 있었다.
오늘일지도 모른다고. 정말 오늘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밤이 깊어질수록 학교는 더 시끄러워졌다.
주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와 사람들 웃음소리가 뒤섞였고, 운동장 쪽 무대에서는 밴드 공연이 한창이었다. 나는 친구들 사이에 앉아 있었지만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만 자꾸 켰다 껐다 했다.
서윤에게서 “조금만 기다려”라는 메시지가 온 건 밤 열 시가 넘어서였다.
그때부터 나는 거의 공연 소리도 제대로 못 들었다.
열한 시쯤, 드디어 서윤이 다시 연락했다.
“끝났어. 학교 앞 골목 쪽으로 나갈게.”
나는 너무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서 옆에 있던 친구가 웃었다.
“야, 어디 가냐.”
“잠깐.”
그 짧은 대답을 남기고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오는데 심장이 아플 만큼 뛰었다.
골목 입구로 가는 길에 밤공기가 생각보다 차게 느껴졌다.
학교 안은 그렇게 시끄러운데, 정문 근처로 나오자 소음이 조금 멀어졌다.
나는 걸음을 늦추지 못했다. 오늘은 진짜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지금까지처럼 도망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골목 모퉁이를 돌자마자, 나는 내가 준비해 온 모든 말을 잃어버렸다.
서윤은 이미 거기 있었다.
다만 내가 상상한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가게 앞 가로등 아래, 그녀는 꽤 많이 취해 보였다.
얼굴은 붉었고, 몸은 똑바로 서 있지 못했다. 누군가가 옆에서 그녀를 붙잡고 있었는데, 처음엔 그게 누구인지 잘 안 보였다.
주변엔 같은 과로 보이는 몇 명이 더 있었고, 다들 술에 조금씩 취한 얼굴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내가 몇 걸음 더 다가가려던 순간, 서윤의 몸이 휘청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남자가 자연스럽게 그녀를 등에 업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더 멈칫했다.
서윤은 거의 저항도 없이 그 남자 어깨에 기대듯 몸을 맡겼다.
손이 느슨하게 그의 옷깃을 잡았다. 주변에 있던 누군가가 웃으며 말했다.
“야, 그냥 네 자취방이 제일 가깝잖아. 일단 재워.”
다른 누군가가 맞장구쳤다.
“맞네. 저 상태론 집 못 가겠다.”
그 말들이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자취방. 재워. 괜찮다는 듯 웃는 얼굴들. 너무 당연한 것처럼 흘러가는 분위기.
나는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그대로 멈췄다.
사실 이상한 점은 많았다.
왜 하필 그 남자인지, 그가 서윤과 어떤 사이인지, 다른 여자 동기가 같이 가는 건지, 정말 집에 데려다주는 것뿐인지. 조금만 더 가까이 갔으면 들을 수 있었을 설명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물을 수도 있었다. 서윤이 거의 정신이 없다는 것도, 그 상황이 내가 멀리서 본 것만큼 단순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고백을 하러 왔던 내가, 정작 그 자리에서는 이름 한 번 부르지 못했다.
서윤을 업은 남자가 천천히 골목 안쪽으로 걸어갔다.
다른 두세 명도 함께 따라붙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서도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마치 누군가가 내 발목을 붙잡은 것처럼.
그 몇 초 사이, 내 안에서는 너무 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지나갔다.
당황, 수치심, 서운함, 질투, 창피함. 무엇보다 제일 컸던 건, 내가 혼자 너무 멀리 와 있었다는 자각이었다.
나는 오늘 밤 무슨 말을 할지 며칠 동안 고민했고, 혼자 마음을 키우고,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처럼 굴었다. 그런데 서윤에겐 전혀 다른 밤이 있었던 것 같았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 내가 모르는 관계들, 내가 전혀 들어가 본 적 없는 시간들.
아, 그렇구나.
그 짧은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리고 나는 너무 쉽게 그 장면을 완성해 버렸다.
설명을 듣기도 전에, 확인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상처받은 사람처럼 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서. 서윤은 내가 자길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르는데, 나는 혼자 마음이 배신당한 것처럼 욱신거렸다. 그게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그때는 몰랐다.
한참 뒤에야 휴대폰이 울렸다.
서윤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미안, 잠깐만…”
그 뒤 문장은 도착하지 않았다. 아마 쓰다가 지웠는지, 아니면 정신이 없어서 못 보낸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짧은 문장을 한참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끝내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골목 끝에서 웃음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가 멀어졌다.
나는 그제야 몸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 품고 있던 문장들이 전부 낯설어졌다.
좋아한다는 말도, 기다렸다는 마음도, 오늘은 다를 거라는 기대도 전부 우스워 보였다.
사실 우스운 건 그 장면이 아니라, 그것 하나로 모든 걸 단정 짓고 있는 내 쪽이었는데도.
돌아가는 길 내내 나는 서윤에게 아무 말도 보내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서도 휴대폰 화면만 몇 번 켰다 껐다 했다.
설명을 요구할 자격이 내게 있는지조차 애매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미 설명을 듣고 싶지 않았다.
듣고 나면 지금의 이 상처가 우스워질까 봐, 아니면 반대로 진짜가 되어 버릴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가장 비겁한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모른 척하고, 괜찮은 척하고, 대신 혼자 닫혀 버리는 쪽으로.
그날 밤 나는 아주 늦게야 잠들었다.
눈을 감으면 계속 같은 장면만 떠올랐다.
가로등 아래 비틀거리던 서윤, 그녀를 업고 골목 안쪽으로 걸어가던 남자의 뒷모습,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서 있던 나.
고백은 결국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먼저 나는 이미 더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좋아하는 사람을 믿는 일,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일, 상처받았다고 해서 곧장 등을 돌리지 않는 일 같은 것들.
하지만 그 밤의 나는 아직 너무 어렸고, 너무 쉽게 혼자 상처받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