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걷던 봄밤-4-

by 진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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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은 이상했다.
가까워질수록 편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조심스러워졌다.


처음 서윤을 자주 보게 되었을 때만 해도 모든 건 단순했다. 강의실에서 마주치면 좋았고,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나면 하루가 조금 길어지는 것 같았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걷고, 별것 아닌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때의 나는 내가 이미 많은 걸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니,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발표가 끝난 뒤에도 우리는 계속 만났다.
핑계는 사소했다. 도서관 갈래, 오늘 휴강인 거 알았어, 커피 마실래, 네가 말한 그 책 찾았어.

그런 짧은 문장들이 쌓이면서 우리 사이엔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들이 조금씩 늘어났다.

도서관 4층 창가 자리에서 각자 공부를 하다가 쉬는 시간에 같이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일, 수업이 끝난 뒤 학생회관 계단에 앉아 다음 강의 시작 전까지 아무 말 없이 휴대폰만 들여다보다가도 어색하지 않은 일, 그런 것들.

나는 그런 시간이 좋았다.
좋아서 자꾸 겁이 났다.


그전까지의 나는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이렇게까지는. 누군가를 계속 생각하고, 그 사람이 웃는 방식 하나에 하루 기분이 달라지고, 답장이 몇 분 늦었다고 괜히 혼자 핸드폰 화면을 다시 켜 보는 일 같은 건 전부 처음이었다.


처음인 건 대개 서툴렀다. 나는 서윤을 좋아하면서 동시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


좋아하면 말하면 되는 거라고, 남들은 그렇게 쉽게 말했지만 그건 내게 전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하고 나면 지금의 이 관계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좋아한다는 고백은 마음을 전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지금까지의 시간을 한순간에 뒤집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꾸 미뤘다.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조금만 더 확실해지면, 그때 말하자고.

문제는 그 ‘조금만 더’가 갈수록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는 거였다.


서윤은 원래 사람을 편하게 대하는 쪽이었다. 처음엔 그게 내가 특별해서 그런 줄 알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나와 있을 때 웃는 얼굴, 내 말을 기억해 주는 방식, 도서관에서 내 자리를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걸 보면서 혼자 의미를 키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다. 서윤은 나한테만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누구와도 잘 웃고, 누구의 말도 쉽게 흘려듣지 않고, 선배에게는 싹싹했고, 동기들 사이에서도 자연스럽게 섞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상하게 서운했다.

한 번은 학생회관 앞에서였다.
도서관에서 책을 반납하고 내려오는데, 서윤이 계단 아래에서 어떤 남자애와 서 있는 게 보였다.

같은 과인 듯했는데 나는 얼굴만 알아도 이름은 몰랐다. 둘은 꽤 편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남자애가 무슨 말을 했는지 서윤이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파일로 상대 팔을 가볍게 툭 쳤다. 그 장면은 정말 별것 아니었다. 누구든 친한 친구끼리 그럴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괜히 계단 위에서 걸음을 멈췄다.

내가 망설이는 사이, 서윤이 먼저 나를 발견했다.

“어, 이준!”

그 목소리에 둘 다 내 쪽을 봤다. 나는 그제야 내려갔다. 서윤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수업 끝났어?”

“응.”

“소개할까? 같은 과 동기인데—”

“괜찮아.”

말이 생각보다 빨리 나갔다.
차갑게 말하려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내 입에선 늘 그랬다.

당황하면 더 무뚝뚝해졌고, 상처받으면 괜찮은 척부터 했다.

서윤이 아주 잠깐 멈칫했다.
옆에 있던 남자애도 애매하게 웃다가 “그럼 난 먼저 간다” 하고 자리를 떴다.

서윤은 그 뒷모습을 잠깐 보다가 내 옆으로 올라왔다.

“왜 그래?”

“뭘.”

“기분 안 좋아 보여.”

나는 가방끈만 괜히 고쳐 잡았다.


사실 기분이 안 좋았다. 그런데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질투했다고 말하기엔 너무 우스웠고, 그런 사이도 아니었다.

애초에 내가 뭘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스스로 잘 몰랐다.

“아냐. 그냥 좀 피곤해서.”

서윤은 잠깐 내 얼굴을 보더니 더 묻지 않았다.


그날 우리는 같이 커피를 마시기로 했던 것도 그냥 없던 일이 됐다. 서윤은 “그럼 들어가서 쉬어”라고 했고,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돌아오는 길에 몇 번이나 휴대폰을 꺼내 봤지만, 먼저 미안하다고 말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잘못한 건 나라는 걸 알면서도.

그 뒤로 나는 이상하게 자꾸 비교하게 됐다.


서윤이 누구에게 웃는지, 누구랑 오래 이야기하는지, 내 메시지엔 얼마나 빨리 답하는지,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 표정이 나와 있을 때랑 어떻게 다른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 유치한 일들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믿는 대신, 나는 그녀의 마음을 시험 들게 만드는 기준들만 혼자 만들고 있었다.

서윤은 아무것도 모르는데, 나는 혼자 기대하고 실망하고 서운해했다.

어느 날 밤에는 그런 일도 있었다.
서윤이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 점심 같이 먹을래?”

나는 그 짧은 문장을 보고도 한참 답을 못 했다. 좋았다. 분명 좋았는데, 동시에 이상한 자존심이 올라왔다.

왜 이렇게 기뻐하지, 나만 이렇게 들뜨는 거면 어떡하지, 별 의미 없는 약속인데 혼자 크게 받아들이는 거면 어떡하지.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다가 답장을 한참 늦게 보냈다.

“응, 좋아.”

다음 날 약속 시간보다 십 분쯤 먼저 학생회관 앞에 도착했을 때, 서윤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미안. 과제 때문에 교수님 붙잡혀서 조금 늦을 것 같아.”

그건 정말 흔한 일이었다. 학교에서는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

나 역시 여러 번 약속 시간을 늦춘 적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메시지를 보고 괜히 마음이 식는 기분이 들었다. 아, 결국 나는 이 정도구나. 먼저 찾을 만큼 특별한 건 아니었구나. 그렇게까지 생각할 일도 아니었는데, 그때의 나는 늘 감정을 한 번 더 비틀어서 받아들였다.


나는 짧게 답했다.

“천천히 와.”

서윤은 십오 분쯤 뒤에 뛰어왔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숨을 고르고,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정말 늦을 줄 몰랐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런 얼굴을 보는데도 나는 마음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스스로가 더 싫었다. 늦게 온 사람보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더 못나 보였다.

“많이 기다렸어?”

서윤이 물었다.

“아니.”

“근데 표정이 아닌데.”

나는 그 말에 괜히 웃어버렸다.
“원래 표정이 이래.”

서윤은 그날 처음으로 웃지 않았다.


그 침묵이 길진 않았다. 우리는 밥을 먹었고, 평소처럼 수업 얘기도 하고, 교수 욕도 조금 했다.

겉으로 보면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서윤은 몇 번 더 내 표정을 살피는 눈치를 보였다.

내가 대답을 짧게 하면 잠깐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고, 예전 같으면 툭 던졌을 장난도 한 번쯤 고르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변화가 싫었다.

내가 만든 거리인데, 정작 그 거리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무서워졌다.

그럼에도 솔직해지지는 못했다.

사실 나는 서윤에게 묻고 싶었던 게 많았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같이 있는 시간이 너에게도 기다려지는지, 다른 사람들과 웃는 것과 나와 웃는 게 같은 건지. 하지만 그런 질문들은 모두 너무 직접적이고, 너무 어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대신 나는 애매한 말과 침묵으로만 마음을 내비쳤다.

먼저 서운해하고, 혼자 삐지고, 상대가 눈치채 주길 바라는 방식으로.

지금 생각하면 정말 찌질했다.
그땐 그걸 몰랐다. 그저 내가 상처받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4월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벚꽃은 대부분 졌고, 학교엔 연둣빛 잎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봄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처음의 들뜸은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수업이 끝난 저녁, 서윤과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캔커피를 마시던 날이었다.

해는 이미 많이 길어져 있었고, 운동장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생각보다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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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이 캔을 손바닥으로 굴리며 말했다.

“요즘 너 좀 이상해.”

나는 웃는 척했다.

“내가?”

“응.”

“뭐가.”

“가끔 가까웠다가, 가끔 되게 멀어.”

그 말은 생각보다 정확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못 했다.

서윤은 잠시 기다리다가 다시 물었다.

“내가 뭐 잘못했어?”

그 순간, 나는 말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잘못한 거 없다고. 그냥 내가 처음이라, 내가 잘 몰라서 자꾸 이상해진다고. 네가 다른 사람이랑 웃는 걸 보면 괜히 혼자 작아지고, 너한테 기대가 생길수록 더 괜찮은 척하게 된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끝내 그러지 못했다.

“아니야.”

너무 쉽게 대답해 버렸다.

“그럼 다행이고.”

서윤은 그렇게 말했지만 표정은 전혀 다행인 사람 같지 않았다.
나는 그걸 보면서도 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 모른다.

우리가 같은 자리에 앉아 있어도 전처럼 가볍지 않아진 건.

분명 서로를 보고 있는데, 같은 걸 보고 있지 않게 된 건.

그날 헤어지고 집에 돌아가는 길, 서윤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아닌데도 자꾸 그런 기분 들면, 나한테 말해줘.”

나는 한참 그 문장을 보고 있었다.


참 이상했다. 상처받은 쪽은 나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다정한 건 늘 서윤 쪽이었다.

나는 혼자 복잡해져서 마음을 구기고 있었고, 서윤은 이유도 모른 채 그 구겨진 자리를 펴 보려고 하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오래 잠들지 못했다.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가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

더 솔직해져야 하는 순간마다 나는 오히려 더 어리고 못나졌다.

내가 첫사랑 앞에서 얼마나 서툰 사람인지, 그제야 조금씩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서툼은, 곧 더 큰 오해를 부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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