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발표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준비할 땐 그렇게 길고 복잡해 보이던 자료가 막상 입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지나갔다. 나는 맡은 부분을 무난하게 설명했고, 다른 조원들도 큰 실수 없이 넘어갔다.
서윤은 중간에 한 번 목이 잠기는 듯했지만 끝까지 차분하게 읽어냈다. 발표가 끝나고 교수님이 “전체적으로 정리 잘했네요”라고 말했을 때, 나는 안도감보다 먼저 옆자리에 앉은 서윤 쪽을 봤다.
그녀는 아주 작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자 조원들은 다 같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가는 “이제 살았다”라고 했고, 누군가는 주말엔 절대 학교 안 오겠다고 말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자꾸 서윤의 표정만 눈에 들어왔다. 긴장이 풀렸는지 눈가가 조금 붉어 보였다. 그녀는 파일을 가방에 넣다가 내가 보고 있는 걸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왜?”
“아까 잘했어.”
그녀가 잠깐 멈칫하더니 웃었다.
“네가 많이 말해서 덜 떨렸지.”
“그래도 잘했어.”
서윤은 대답 대신 어깨를 조금 으쓱였다.
그 사소한 몸짓이 이상할 만큼 사랑스럽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조금 어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자꾸 이런 식이었다. 남들 눈엔 아무것도 아닐 장면 하나가 혼자만 선명하게 남았다.
다른 조원 둘은 점심 약속이 있다며 먼저 나갔다. 우리는 강의실 뒤편에 잠깐 남아 있었다. 서윤이 노트를 정리하며 말했다.
“이제 진짜 끝이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기묘한 허전함을 느꼈다. 분명 발표가 끝나서 홀가분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조금 조용해졌다. 이제는 자료를 핑계로 메시지를 보내지 않아도 되고, 스터디룸 시간을 맞출 필요도 없고, 수업이 끝난 뒤 굳이 같이 남아 있을 이유도 사라졌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런 내 표정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서윤이 덧붙였다.
“근데 끝났다고 아예 안 볼 사이는 아니잖아.”
나는 그 말에 조금 늦게 웃었다.
“그건 그렇지.”
“너무 서운해하는 얼굴이라서.”
“안 서운했거든.”
“조금은 했네.”
서윤은 꼭 놀리는 것 같지도, 그렇다고 진지한 것도 아닌 얼굴로 말했다. 나는 반박하지 못했다.
들킨 기분이 들었다.
강의실을 나와 학생회관 쪽으로 걷는데, 날씨가 유난히 좋았다. 며칠째 내리던 봄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개어 있었다. 햇빛은 환한데 바람은 아직 약간 서늘해서, 셔츠 소매를 걷을까 말까 망설이게 되는 오후였다.
운동장 쪽에서는 축구공 차는 소리가 들렸고, 벤치에는 벌써 점심을 먹는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오늘은 진짜 밥 맛있겠다.”
서윤이 말했다.
“발표 끝나서?”
“응. 시험 끝난 날보다 이런 날이 더 좋아.”
나는 무심한 척 물었다.
“점심 먹고 갈래?”
그 말은 내 입에서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나왔다. 묻고 나서야 조금 놀랐다.
서윤은 잠깐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한마디에 괜히 세상이 조용해졌다. 물론 점심 한 끼가 특별한 건 아니었다.
학교에선 누구랑도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날만큼은 이상하게 다르게 느껴졌다.
과제가 아니라, 조 모임이 아니라, 정말 둘이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학생회관은 점심시간이라 붐볐다. 자리가 거의 없어서 한 바퀴를 돌다가 창가 쪽 두 자리짜리 테이블 하나를 간신히 찾았다. 나는 제육덮밥을, 서윤은 돈가스를 시켰다.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는 트레이를 앞에 두고 별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상하게 어색하진 않았다. 발표 전엔 늘 해야 할 얘기가 있었고, 오늘은 그게 없었는데도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부터 무슨 말을 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근데 너.”
서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응?”
“발표할 때 목소리 진짜 안 떨리더라.”
“속으로는 떨려.”
“안 그래 보여.”
“안 그런 척하는 거지.”
서윤이 잠깐 나를 봤다.
“너는 그런 거 잘하는 것 같아.”
“뭘?”
“괜찮은 척.”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웃으면서 한 말이 아니라서 더 그랬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꺼낸 말 같았다. 순간 조금 당황했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넘긴 표정들을 이 사람은 생각보다 오래 보고 있었구나 싶어서.
“너도 그렇잖아.”
겨우 그렇게 말하자, 서윤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나는 티 많이 나.”
“안 나.”
“그럼 다행이고.”
음식이 나와서 대화는 잠깐 끊겼다. 우리는 배가 꽤 고팠는지 한동안 젓가락질에만 집중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대화가 끊겼다는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그 짧은 침묵 안에서도 뭔가가 천천히 자라고 있는 것 같았다. 말로 확인하지 않아도, 둘 사이에 전과는 다른 공기가 생기고 있다는 걸 서로 어렴풋이 알고 있는 느낌.
식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 학생회관 앞 벚꽃은 거의 만개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연한 분홍빛이 한두 장씩 떨어졌다. 서윤은 계단 아래에 멈춰 서서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
“이때가 제일 예쁜 것 같아.”
“벚꽃?”
“응. 막 피었을 때보다, 다 피고 나서 조금씩 흔들릴 때.”
“지는 건 별로 안 아쉬워?”
그녀는 내 말에 잠깐 생각하더니 웃었다.
“아쉬워서 더 예쁜 거 아닐까.”
그 문장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가슴이 저릿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벌써 지나가버릴 순간들부터 아쉬워하는 사람처럼 들려서. 나는 순간적으로, 지금의 이 시간이 언젠가 끝날 수도 있다는 걸 아주 선명하게 깨달았다.
수업이 바뀌고, 계절이 지나고, 이유 없이 자연스레 멀어질 수도 있는 관계.
그 가능성이 불쑥 현실처럼 다가오자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서윤이 그런 내 표정을 눈치챘는지 물었다.
“왜, 갑자기 진지해졌어?”
“아니, 그냥.”
“그냥?”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 말 들으면 가끔 이상해져.”
“내가 뭘 했다고.”
“모르겠어. 그냥 좀 그래.”
서윤은 대답 대신 한참 나를 보더니, 이내 시선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래.”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벚꽃잎 몇 장이 우리 사이로 떨어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는데도 이상하게 오래 기억될 것 같았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손에 들고 있던 캔커피만 괜히 돌렸다.
서윤 역시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발끝으로 떨어진 꽃잎을 건드리고 있었다. 방금 오간 대화가 아무 의미도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이미 멀리 가 있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발표가 끝났다는 사실과 상관없이 계속 만났다. 처음엔 정말 사소한 핑계였다.
발표 자료 파일 최종본을 받을 겸, 교수님이 남긴 피드백을 확인할 겸, 지난번에 빌린 볼펜을 돌려줄 겸. 그런데 그런 핑계들은 금방 소진됐고, 그 뒤에도 이상하게 우리는 자주 마주쳤다.
“지금 도서관?”
“응. 너는?”
“나도.”
“커피 마실래?”
대화는 점점 짧아졌고, 짧을수록 더 자연스러워졌다. 설명이 필요 없는 사이가 되어 가는 것 같았다.
같이 걷고, 같이 앉아 있고, 각자 공부를 하다가도 쉬는 시간엔 같은 자판기 앞에서 마주쳤다.
전에는 우연처럼 느껴지던 것들이 이제는 조금씩 서로를 향한 움직임처럼 보였다.
어느 날 저녁, 중앙도서관 4층 열람실에서 공부하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서윤은 내 맞은편 두 자리쯤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형광펜 뚜껑을 입술에 대고 한참 책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이 마주쳤다. 정말 잠깐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웃었다. 소리 없는, 아주 옅은 웃음이었다. 나는 그 순간 책에 적힌 글자를 한 줄도 읽을 수 없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커지고 있었다. 이제는 부정할 수도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말할 것인가, 모르는 척할 것인가. 그 둘 사이에서 나는 자주 망설였다. 고백하고 나면 지금의 이 편안함을 잃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영영 알 수 없는 마음으로 남을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그 시절의 나는 아직 믿고 있었다. 좋아하는 마음은 꼭 급하게 결론 내리지 않아도 된다고. 어쩌면 조금 더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서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이미 충분히 특별했으니까. 그리고 나는 아직, 그 시간이 얼마나 오래 나를 흔들게 될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날 밤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휴대폰이 울렸다. 서윤이었다.
“오늘 나 좀 많이 웃은 것 같아.”
나는 걸음을 멈추고 화면을 한참 바라봤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이렇게 보냈다.
“나도.”
몇 초 뒤 답장이 왔다.
“그럼 다행이다.”
나는 그 문장을 보고 한참 웃었다. 봄밤 공기가 이상할 만큼 가벼웠다. 아주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무언가가 우리 사이에 생겨나고 있었다. 아직 이름 붙일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분명한 건 있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그녀를 우연으로 만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