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걷던 봄밤-2-

by 진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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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과 단체 채팅방이 생긴 뒤로, 휴대폰을 보는 횟수가 이상할 만큼 늘었다.

원래 나는 연락에 민감한 사람이 아니었다. 꼭 답해야 하는 말이 아니면 조금 늦게 봐도 괜찮다고 생각했고, 알림이 울려도 당장 확인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 주말만큼은 달랐다. 진동이 한 번 울릴 때마다 괜히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대부분은 별거 아닌 메시지였다. 발표 자료 링크, 기사 캡처, “이 부분은 제가 정리해둘게요” 같은 짧은 말들. 그런데도 서윤의 이름이 화면에 뜨는 것만으로 방 안 공기가 아주 조금 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월요일 아침, 강의실에 들어섰을 때 서윤은 이미 와 있었다. 창가 쪽, 늘 앉던 자리였다. 나는 별일 아닌 척 두 줄 뒤에 앉았지만, 가방을 내려놓는 손끝이 괜히 어색했다.

그녀는 노트에 뭔가 적고 있다가 내가 들어오는 걸 보고 아주 짧게 손을 들었다.

“안녕.”

나는 그 인사가 이상하게 좋았다. 아침의 소란 속에서 나만 알아듣게 건네는 작은 신호 같아서.

“일찍 왔네.”

“자료 프린트하려고. 집 프린터가 말썽이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투명 파일 하나를 들어 보였다.

종이 가장자리가 반듯하게 정리돼 있었다. 그런 걸 보면 서윤은 꼭 자기 마음까지 가지런한 사람 같았다. 물론 실제로도 그럴지는 몰랐다. 누구나 정리된 얼굴 안에 어수선한 마음 하나쯤은 숨기고 사니까.


수업이 끝난 뒤 우리는 학생회관 카페에서 다시 만났다. 다른 조원 둘은 늦는다며 먼저 시작하라고 했다.

창가 자리에 마주 앉아 노트북을 펴고 자료를 맞추는데, 처음엔 발표 순서 얘기만 오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둘만 남겨진 시간은 점점 과제 바깥으로 흘렀다.


“너 진짜 메모 많이 한다.”

내가 말했다. 서윤의 노트에는 형광펜 색깔이 세 가지나 올라가 있었다.


“안 그러면 다 까먹어.”

“나는 적어도 나중에 못 알아보겠던데.”

“그건 너 글씨가 너무 날아가서 그래.”

그녀가 웃으며 내 필기 노트를 손가락으로 밀었다. 나는 괜히 뺏기듯 노트를 덮었다.


“보지 마.”

“왜, 부끄러워?”


“좀.”

“의외네.”


“너 맨날 의외래.”

“왜냐하면 너는 처음 보면 되게 안 그럴 것 같거든.”


“어떻게?”

서윤은 잠깐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말수 적고, 무뚝뚝하고, 혼자 다 잘할 것 같은 사람.”

“실망했어?”

“아니.”


그녀가 빨대를 한 번 돌리며 말했다.

“생각보다 더 편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대답을 바로 하지 못했다. 그냥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만 손가락으로 괜히 문질렀다.


생각보다 더 편하다는 말이 그렇게 오래 남을 줄 몰랐다.

누군가에게 편한 사람이 된다는 건,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것과는 다르지만, 어쩌면 그 전 단계쯤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날 처음으로 그런 쓸데없는 기대를 해봤다.


그 뒤로 우리는 과제를 핑계로 자주 만났다. 도서관 스터디룸 예약이 비는 시간에 맞춰 자료를 고치고, 수업 끝난 뒤 잠깐 복도에 서서 발표 순서를 확인하고, 학생회관에서 종이컵 커피를 뽑아 마시며 교수님 질문 예상답안을 정리했다. 다른 조원들이 빠지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기뻤다.


서윤은 같이 있으면 이상하게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데가 있었다.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니고, 리액션이 큰 것도 아니었다. 대신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도서관 에어컨 너무 세다”라고 하면 다음에 만나서 작은 캔커피를 하나 건네고, “지하철에서 자는 거 싫다”고 하면 “내릴 역 놓친 적 있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이어 물었다. 나는 그런 사소한 기억력이 신기했다. 내가 무심코 흘린 말들이 그녀에게는 잠깐이라도 머물렀다는 뜻이니까.


어느 날은 수업이 휴강된 걸 모르고 학교에 왔다가, 복도에서 서윤을 만났다.

그녀도 같은 이유로 헛걸음을 한 참이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안 왔지.”

내가 말하자 서윤이 웃었다.

“그래도 날 봤잖아.”

그 말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와서, 오히려 나는 웃는 타이밍을 놓쳤다.

서윤은 내가 멈칫한 걸 보고 아차 싶었는지 바로 시선을 피했다.

“아, 그러니까… 같은 팀원 봤잖아.”

“응. 뭐, 손해는 아니네.”

겨우 그렇게 말했지만, 그날 나는 복도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이 괜히 들뜬 걸 몇 번이나 확인했다.

이상한 건, 그녀를 기다리는 일이 점점 자연스러워졌다는 거였다. 전에는 수업 종이 울리면 제일 먼저 가방을 챙기던 내가, 이제는 그녀가 노트를 덮을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먼저 나갈 수 있는데도 괜히 한 챕터를 더 읽는 척했다. 혹시 같은 시간에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을까 싶어서. 기다림이라는 게 이렇게 조용히 습관이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발표 전날, 우리는 도서관 4층 스터디룸에서 마지막으로 자료를 맞췄다. 창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복도엔 사람 발소리도 뜸했다. 다른 조원 둘이 먼저 나가고 나서, 서윤과 나만 남아 노트북을 덮었다.


“긴장돼?”

내가 물었다.

“조금.”

“괜찮아. 내가 많이 말할게.”

“그게 더 부담인데.”

서윤이 웃었다. 그리고 잠깐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근데 네가 옆에 있으면 덜 떨려.”


나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펜만 만지작거렸다.

좋아하는 마음이란 원래 이렇게 상대의 말 한마디에 속수무책이 되는 건가 싶었다. 큰 의미 아닐 수도 있었다. 그냥 팀원으로서 하는 말, 순간의 안도감 같은 것. 그런데도 나는 그 말을 너무 쉽게 넘길 수 없었다.


스터디룸에서 나와 도서관 복도를 걷는데, 창밖으로 봄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아주 가는 비였다. 바닥에 닿기도 전에 녹아버릴 것처럼 연한.

“비 온다.”

서윤이 유리창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우산 있어?”

“없어.”

“나도 없는데.”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정문까지 뛰어갈까 하다가, 비가 세지진 않을 것 같아 그냥 처마 밑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젖어도 상관없을 만큼 가벼운 밤이었다.

서윤은 손등으로 몇 방울 떨어진 빗물을 훔치며 말했다.


“이상하다.”

“뭐가?”

“요즘 학교 오는 게 전보다 재밌어.”

나는 그 말을 듣고 심장이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빨라지는 걸 느꼈다. 이유를 묻고 싶었다. 과제 때문인지, 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하지만 그 질문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대신 나는 아주 비겁한 방식으로만 물었다.


“왜?”

서윤은 잠깐 내 쪽을 봤다가, 다시 앞을 봤다.

“글쎄. 그냥… 기다려지는 시간이 생겨서?”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나는 그 문장을 혼자 몇 번이고 반복했다.

기다려지는 시간이 생겼다는 말. 그게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도, 적어도 내게는 아주 오래 남을 말이었다.


자취방에 도착해서 젖은 운동화를 벗는데 문득 깨달았다. 나도 이미 같은 마음이라는 걸.

어느새 하루의 시작과 끝을 그녀가 있는 쪽으로 맞추고 있었다. 수업 시간보다 먼저 그녀의 자리를 찾고, 메시지의 길이보다 답장이 오는 속도를 기억하고, 특별할 것 없는 하루에도 그녀가 잠깐 스쳐 지나가면 그날 전체가 달라졌다.


좋아한다는 말은 아직 너무 커서 입안에 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있었다. 이제 내게 학교는 더 이상 강의실과 과제만 있는 곳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게 되는 장소였고, 그 기다림이 지루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루를 견디게 하는 이유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점점 숨기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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