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걷던 봄밤

by 진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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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늘 남들보다 조금 늦게 내게 왔다.

누군가는 3월이 되면 벌써 봄이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벚꽃 축제 포스터가 붙는 순간 겨울이 끝났다고 믿었다. 하지만 나는 계절을 그렇게 빨리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침 공기엔 아직 차가운 금속 같은 냄새가 남아 있었고, 해가 길어졌다고는 해도 저녁 바람은 여전히 손등을 시리게 했다. 캠퍼스 화단에 이름 모를 꽃이 몇 송이 피어 있는 걸 봐도, 나는 그저 관리하시는 분이 부지런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해 봄도 마찬가지였다.


개강 첫 주의 학교는 이상하게 시끄러웠다. 새내기들은 지도 앱을 켠 채 길을 잃었고, 복학생들은 어딘가 다 아는 표정으로 느긋하게 걸었다. 학생회관 앞에는 동아리 부스가 길게 늘어서 있었고, 누군가는 기타를 치고, 누군가는 전단지를 쥐여 줬다. 잔디밭에 앉은 사람들 사이로 햇빛이 번들거렸고, 건물 유리창엔 하늘이 필요 이상으로 맑게 비쳤다.


나는 그런 풍경을 대체로 멀찍이서 보는 편이었다.

원래부터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혼자 밥을 먹는 것도, 빈 강의실 뒤쪽 창가에 앉아 이어폰을 꽂고 있는 것도, 수업이 끝난 뒤엔 괜히 바로 기숙사나 자취방으로 가지 않고 캠퍼스를 한 바퀴 도는 것도 익숙했다. 누군가와 붙어 다니기보다는, 적당히 인사하고 적당히 웃고, 적당한 거리에서 지내는 쪽이 편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내가 한 사람을 오래 바라보게 됐다는 사실이 더 낯설었던 건.

처음 본 건 교양 수업이 있는 강의실이었다.

개강 둘째 주 월요일, 오전 수업답게 강의실엔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들이 가득했다. 나는 늘 그렇듯 너무 앞도, 너무 뒤도 아닌 자리 하나를 골라 앉아 있었다.

교수님은 빔프로젝터가 왜 연결되지 않느냐고 조교에게 묻고 있었고, 앞줄 누군가는 텀블러 뚜껑을 떨어뜨렸다. 그런 소란 속에서 문이 열렸다.


누군가 조금 급하게 들어왔다.

검은 머리가 어깨에 닿을 만큼 내려와 있었고, 손엔 아직 마개도 열지 않은 펜이 들려 있었다. 뛰어왔는지 숨을 약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는 비어 있는 자리를 찾다가 내 두 줄 앞, 창가 쪽에 앉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머리를 한번 귀 뒤로 넘기고, 노트를 펼쳤다. 그게 다였다. 정말 별것 아닌 장면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날 수업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대신 그녀가 필기를 시작하기 전에 꼭 손끝으로 종이 모서리를 반듯하게 맞추던 습관, 교수님이 농담 아닌 농담을 던졌을 때 남들보다 반 박자 늦게 웃던 타이밍,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에 머리카락 몇 올이 흔들리던 모양 같은 것만 이상할 만큼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게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예쁜 사람을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더 보게 되니까. 낯선 얼굴이 반복되면 괜히 기억에 남을 수도 있으니까.

그 정도로 넘기면 되는 일이었다. 실제로 그날 수업이 끝난 뒤에도 나는 별생각 없이 가방을 챙겨 나왔다.

학생회관에서 김치참치덮밥을 먹고, 도서관에 들렀다가,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다음 날에도 그녀를 봤다.

중앙도서관 1층 복도에서였다. 복사기 앞에 서서 지갑을 뒤적이고 있었다.

복사카드를 안 가져왔는지 가방 안을 한참 찾다가, 이내 포기한 듯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무심코 지나치려다가 발을 멈췄다.

“저기.”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복사카드 없으면 학생증으로도 돼요.”

말을 꺼내고 나서야 내가 굳이 왜 아는 척을 했는지 조금 후회했다. 괜히 오지랖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색해하지 않았다.


“아, 진짜요?”

“네. 여기 아래에 찍으면 돼요.”

나는 기계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녀가 내 말대로 학생증을 대자 기계가 바로 켜졌다.

파란 불빛이 들어오는 걸 본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다행이다” 하고 웃었다.

“감사해요.”

별말도 아니었는데, 그 말이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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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나는 그녀를 학교에서 자주 마주쳤다. 물론 같은 학교, 같은 학년쯤 되면 비슷한 동선이 겹칠 수 있다. 그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래도 이상하게 그녀는 자꾸 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학생회관 앞 계단, 문과대 건물 옆 오르막길, 편의점 냉장고 앞, 심지어는 내가 좋아하던 중앙도서관 4층 구석 열람실에서도.


그녀를 볼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반가움이라기엔 조금 이르고, 낯섦이라기엔 이미 여러 번 본 얼굴이었다. 마치 아직 이름도 모르는 노래를 자꾸 흥얼거리게 되는 것처럼, 설명하기 어려운 익숙함이 천천히 번져 왔다.


이름을 알게 된 건 그 주 금요일이었다.

교양 수업에서 조별 발표를 한다며 교수님이 임의로 팀을 나눴다.

출석부를 보며 이름을 부르는데, 내 이름 다음으로 들린 두 글자가 묘하게 귀에 걸렸다.

“한서윤.”

창가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짧게 대답했다.

“네.”

그제야 이름이 생겼다. 얼굴만 있던 사람이 이름을 갖는 순간, 이상하게 거리감이 조금 달라졌다. 한서윤. 속으로 한번 따라 불러 봤을 때 생각보다 부드럽게 입안에 감겼다.


조별 모임은 어색했다. 네 명이 둥글게 앉았지만 다들 아직 서로를 잘 몰랐다.

누군가는 노트북만 쳐다봤고, 누군가는 괜히 웃기만 했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건 서윤이었다.

“자료조사는 제가 할게요. 발표는… 제가 좀 못해서.”

말투는 조용했지만, 피하려는 사람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냥 솔직한 사람의 말이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말했다.

“그럼 발표는 제가 할게요.”

서윤이 나를 봤다. 그리고 웃었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그 순간 웃음이라는 게 이렇게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화려한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소리 없이 번지는 쪽에 가까웠다.

눈가가 먼저 가늘어지고, 그다음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는 웃음. 괜히 나도 따라 웃게 되는 종류의 웃음이었다.


그날 우리는 학생회관 카페에서 잠깐 더 이야기했다. 발표 주제를 고르고, 역할을 나누고, 단체 채팅방을 만들었다. 대화는 대부분 과제 얘기였지만 중간중간 사소한 것들이 섞였다.

서윤은 수업 시간에 필기를 엄청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집에 가면 다시 정리하느라 두 번 일한다고 했고, 나는 발표는 괜찮지만 질문 받는 건 싫다고 말했다.

다른 조원 둘이 먼저 일어나고 나서, 나와 서윤만 잠깐 더 남게 된 순간이 있었다.

어색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그렇지 않았다.

“아까 복사기 앞에서 알려준 거, 그때 진짜 고마웠어요.”


서윤이 빨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거 별거 아니었는데.”

“그래도요. 저 그런 기계 앞에서 꼭 한 번씩 멈춰요.”


“나도 키오스크 잘 못 써.”

“진짜요?”


“응. 뒤에 사람 서 있으면 더 못 하겠어.”

그녀가 웃었다.


“약간 의외다.”

“뭐가?”

“발표하겠다고 먼저 말해서.”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발표는 정해진 말 하면 되잖아. 근데 기계는… 갑자기 선택지가 너무 많아.”

서윤은 한동안 웃음을 참지 못했다. 카페 창문 밖으로 햇빛이 기울어 들어오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아이스컵 표면에 물방울이 맺혔다. 그녀가 웃는 걸 보면서, 나는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을 느꼈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과 앉아 있는 것 같은 편안함과, 반대로 방금 시작된 낯선 긴장이 동시에 있었다.

헤어질 때 서윤이 말했다.

“다음 주에 자료 정리해서 보내드릴게요.”

“어, 편하게 말해도 돼.”

내 말에 그녀가 잠깐 눈을 깜빡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보내줄게.”

카페 문을 나서기 직전, 그녀가 뒤돌아 나를 한번 봤다.


“아, 그리고.”

“응?”

“이름 아직 못 물어봤다.”

“뭐를?”

“네 이름.”

나는 이상하게 그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지 않았다.

정말 이제야 떠올랐다는 듯 담담하게 묻고 있었다.

“이준.”

“이준.”

그녀가 내 이름을 천천히 불렀다.


불과 두 음절인데, 내 이름이 그렇게 낯설게 들린 적은 처음이었다.

서윤은 가볍게 손을 흔들고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카페 앞에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학생회관 앞은 여전히 시끄러웠고, 누군가는 웃고 있었고, 누군가는 급하게 전화를 받으며 지나갔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냈을 풍경이 그날은 이상할 만큼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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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어 자취방으로 돌아온 뒤에도 쉽게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샤워를 하고 책상 앞에 앉았는데, 노트북 화면보다 먼저 카페 안의 햇빛, 얼음컵 위 물방울, 그리고 내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날 밤 나는 괜히 창문을 열어 봤다. 아직은 찬 기운이 남은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멀리 학교 쪽에서 누군가 떠드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리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들떠 있었다. 이유를 모르는 척하기엔 이미 너무 또렷했다.

아직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건 너무 빠르고, 너무 앞서간 단어였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있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봄이 왔다고 생각했다.

꽃이 피어서도 아니고, 해가 길어져서도 아니었다.
내 이름을 한번 불러 준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