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오픈이다. 손님들이 밀려온다.
여기 이곳은 직원 반 손님 반이다.
초보였던 나의 실수를 되돌아볼 때, 그중 손가락 첫 번째를 차지하는 건 다름 아닌 직원문제였다.
테이블은 20개도 되지 않은 식당에 단가 7천 원짜리 음식을 팔면서 직원이 5명이나 되었다. 일이 무서웠던 내가 선택한 대처 방법이었다. 하지만 흔히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했던가? 내 경우에는 직원들끼리의 마찰이 그랬다. 힘든 일을 하면서 서로 배려하지 않고, 누가 그만두지 않으면 자신이 그만두겠다는 식의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일도 힘든 상황에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누적되며 배가 점점
산으로 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직원들의 시시콜콜한 사건들은 번외로 적어 낸다고 해도 구구절절 사연이 많으나, 사적인 영역이고, 전 사장님의 문제와는 달리 개개인을 놓고 보면 모두가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준 사실을 확신하기 때문에, 따로 언급하지 않는 쪽을 택한다.
식당일의 진짜 시작은 모두가 가고 없는 저녁 시간에 있었다.
나는 무늬만 사장이었지, 매일 꽃게장을 직접 담아야 하는 내 위치가 상당히 곤혹스러웠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고 나면, 남편은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세 살짜리 막내딸을 데리고 식당으로 왔다.
(3살이었던 막내딸)
언니들이 집에 일찍 와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항상 그렇게 했다.
함께 재빨리 늦은 저녁을 먹고, 내가 양념에 들어갈 밑 준비를 해주고 나면, 남편은 곧장 고추 가는 일을 했다.
기계를 무서워하는 나를 위한 배려였다.
식당용 고추 가는 기계는, 큰 벨트가 달린 데다, 칼날도 큼직해서 외관부터 무서웠다. 작업할 때 나는 소리는 또 어찌나 큰 지, 바로 앞에서 마주 보며 이야기하는데도 아주 큰 소리로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이 기계를 무서워하는 데는 따로 이유가 있었다.
어릴 적 실제로 손가락을 다치는 상황을 목격한 적이 있으니 말이다.
남편이 양념을 갈고 있을 때, 나는 잔심부름을 해가며 간장게장 소스 끓이는 일과 가게 마감 정산을 했다.
그 밖에도 행주를 삶는다던지 하는 잔일들은 끝도 없었다.
남편은 자기 일도 하루종일 힘들었을 텐데, 약속(배드민턴 같은 운동과 모임이 남들보다 꽤 많은 편이다)도 포기하고, 족히 한 달은 매일 도와주었다.
일도 하다 보니 익숙해지고 빨라졌지만, 여전히 12시를 넘기고 있었다.
처음 일주일은 몸만 내 것이고, 정신은 남의 것인 상태로 집에 있는 시간보다 식당에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어릴 적 친정엄마가 생각나는 시간들이었다.
연년생 중고등학생 아들 딸들의 도시락까지 챙겨주며 새벽밥을 지어 주시고, 식당을 꾸려 나가셨던 나의 어머니.
그땐 막연히 힘들었겠다 생각했던 일이 아픔으로 다가왔다.
몸이 힘들다고 남몰래 울던 나약한 어른이었던 나.
열심히 살아서 성공한 친구들의 소식에 왜 손뼉 쳐주지 못하고 우울함을 느꼈는지 부끄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직장 다닐 생각은 없으면서 성공은 하고 싶어서, 사장이라는 타이틀에 혹해 내가 내 무덤을 파고들어 온 나였다.
정신없이 개업식을 치르고 일주일이 지나자 투잡 아닌 투잡을 하게 된 남편은 내 몰골도 자신도 아이들도 누구 하나 행복하지 않은 이 일을 그만두는 게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권했다. 내가 이만큼 힘들었을 때 남편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버티라고 했다면 그만두고 싶었을 텐데 그만둬도 된다는 말에 오히려 버티고 싶어졌다.
나를 축하해 주고 응원해 주기 위해 찾아와 준 많은 사람들에게 겨우 일주일 짜리 사장으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철없는 어른이라도 그건 아니었다.
힘들어도 무조건 일 년 이상 버텨보자는 결심을 하며, 잠든 아이를 안고 새벽 별을 보며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