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혼한 10가지 이유_시어머니 (2)
#4. 타인으로부터 관심과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이들은 모든 사람의 관심이 자신에게 쏠려 있기를 바란다.
어머닌 요리를 잘하셨다. 내가 놀러 가는 날이면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주셨다. 아들의 여자 친구를 반겨주시는 따뜻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이 부분을 단지 나르시시스트의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위한 과시였다고 치부하고 싶진 않다.
어머닌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고 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할까 봐 늘 걱정이라고 하셨다. 술에 많이 취한 날 "너도 나를 무시하니?"라고 여러 번 물으셨다. '어머니께서 이런 생활을 계속 이어가신다면 그렇게 될 수도요.'라고 생각하고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인정 욕구는 누구나 갖는 기본 욕구이다. 나르시시스트들의 인정 욕구는 '나만 최고'가 되어야 하는 특징이 있다. 가족여행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모님의 시어머니께서 담가주신 장아찌가 인기였다. 시어머니의 반찬이란 걸 안 사람들은 칭찬을 이어나갔다. 실제로 정말 맛있었다.
다른 사람의 반찬에 칭찬이 이어지자, 어머니는 매우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이모님께 같은 반찬을 만들어 주겠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그리고 결국 화를 내셨다. 그 반찬이 그렇게 맛있으면 앞으로 나는 해주지 않겠다고 역정을 내시며 기분 상했음을 드러내셨다.
그리고 몇 초의 정적. 모두가 불편했지만 아무 일 없는 척했다. 무엇이 두려웠던 걸까.
#5. 자신은 늘 완벽하고 절대 흠이 없다고 생각한다. 혹시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도 당당하다. 상황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합리화한다.
시부모님들의 싸움을 처음 본 건 남자 친구 집에서 처음 자던 날이었다. 소란한 기운에 잠이 깼고, 거실로 나가보니 이모님의 부축을 받으며 비스듬히 선 어머니가 보였다. 술에 많이 취한 듯 보였고, 누군가를 향해 욕을 하고 있었다. 잘 들어보니 아버님에게 하는 원망의 말들이었다.
어머니의 말씀을 들어보니 결혼 생활 내내 아버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것 같았다. 이모님은 민망하신 듯 얼른 들어가 자라고 하셨다. 아들의 여자 친구가 집에 있다는 걸 언니에게 말하며 재우려 했지만, 어머닌 한참을 더 욕과 눈물을 쏟아내고 나서야 잠이 드셨다.
남자 친구의 집이 너무 멀어, 내가 이곳에 오게 되면 자고 가야 했다. 남자 친구가 서울로 오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에 그 후로 부모님의 싸우는 모습을 목격할 일은 별로 없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실수 하기 마련이고, 그날 어머닌 술을 드셨으니 그러셨겠지라고 생각했다.
결혼 후 시댁 아래층에 살게 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어머니가 언제 오실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머닌 모임이 많았다.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사람들에게서 얻으려는 듯 일주일에 두세 번은 만취한 상태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취한 날엔 밤새 싸움이 있었다.
다음 날 어머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새벽 1시든 2시든 우리 집에 와서 울고 가신 것도, 밤새 천정이 무너질 것 같이 발을 구르시며 분노하신 것도 모두 잊으셨다. 격식을 차릴 줄 아는 멋진 첫인상의 어머니의 실체는 자존감 낮은 욕쟁이였다.
그렇게 잠을 설치고 나면 하루 종일 피곤했다. 새벽에 일을 시작하시는 아버님은 뜬 눈으로 출근하셔야 했다. 다른 사람이 힘든 것에 관심이 없는 나르시시스트는 가족의 일에 관심이 없었다.
어머니는 때로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누가 술을 많이 먹여서, 아버님이 말씀을 심하게 하셔서 등 다양한 이유를 덧붙이셨다.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처음엔 정말 괜찮았다. 사연이 많은 어머니가 같은 여자로서 안타까웠다. 하지만 1년이 지날 무렵 나는 이곳에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문제 해결 능력이 없는 나르시시스트들은 모든 문제를 남의 탓으로 돌리곤 한다. 이 부분에서 어머니는 특히 정도가 심했다. 어머닌 자동차 사고에서 자신의 부주의를 인정하지 않으셨다. 문제는 언제나 다른 곳에 있었다. 하필 그날 누군가 태워달라는 바람에 그 길을 지나가다 바퀴가 터지거나, 운 없게도 그 자리에 바위가 놓여있었기 때문이라고 탓했다.
주차한 차를 빼다 다른 차를 긁는 사고를 냈을 때, 어머닌 그 자리에 차가 주차되어 있던 것이 문제라고 하셨다. 이 말을 들을 때 문제의 심각성을 전남편에게 얘기하고 치료를 권했다. 그 사람은 어머니를 병원까지 모셔갈 자신이 없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좀 더 일찍 치료를 받게 했더라면 오늘 우린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다들 입을 다물고 있으면 자신이 이상한 지 알 수 없다. 자기 객관화가 전혀 되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다 보니 어머니에겐 오랜 친구가 없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사람들은 항상 나를 이용하다 떠난다'라고 하셨다. 그들을 '나쁜 사람'이라 부르던 어머니가 안타까웠다.
#6. 자녀가 성장하여 독립할 나이가 되면 끊임없이 자신을 떠나지 못할 이유를 만들어낸다. 그래도 자녀가 거부하며 떠나려고 하면 불효자로 만들어버린다.
어머니는 40에 면허를 취득하시고 드디어 자신의 삶을 사셨다고 했다. 어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스물둘, 어머니는 마흔아홉이었으니 지금의 나보다 겨우 5살 많을 때라는 게 재밌다.
평생 희생하는 삶을 살아오다 이제야 내 삶을 산다는 어머니는 손주 봐줄 생각도 같이 살 생각도 전혀 없다고 하셨다. 아무도 묻지 않은 그 말을 만날 때마다 하셨다. 아마도 그렇게 하는 게 '멋짐'을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그러려고 하셨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자식을 못 떠나게 막기 위한 가스라이팅은 결혼이 확실 해 진 이후 시작되었다. 집을 마련하기 위한 자금으로 땅을 사셔서 아래층에 살게 만들었다. 방 하나 거실 하나 주방 하나인 우리 집은 신혼집으로 나쁘지 않았다. 거실 창으로 보는 정원의 나무와 꽃은 정말 예뻤다.
걱정이 되었던 건 수돗물에 녹이 많다는 것과 비가 오면 천정에 물이 차서 곰팡이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정수기 점검을 오던 분은 매달 녹물 필터를 갈아주시며 나보다 더 걱정을 하셨다. 필터 교체 주기가 따라 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녹물에 우유를 타고, 이유식을 끓여야 했다.
12시가 지난 늦은 시간에 술에 취한 시어머니를 맞이해야 하는 건 불안증을 만들어 냈다. 불안을 가중시키는 건 그 방문에 규칙이 없다는 점이었다. 오늘일지 내일일지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커질 무렵 처음으로 분가 얘기를 꺼냈다.
원룸이어도 좋았다. 하루만이라도 문이 잠긴 집에서 편하게 자고 싶었다. 우리 생각을 알게 되신 어머니는 방수공사를 하고 옆집을 내보내 집을 더 넓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다. 당시 우리 집은 큰 집을 반 나누어 한쪽만 사용하고 있었다.
방수 공사 후에도 집은 계속 물이 샜다. 곰팡이로 가득 덮인 천정을 보면 우울했다. 숨 쉴 때마다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작은 아기의 몸을 곰팡이로 채우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몇 차례 더 손을 본 후에 다시 한번 집을 나가겠다 말씀드렸다.
어머닌 우리를 붙잡아 두기 위해 2천만 원을 들여 리모델링을 결정하셨다. 마음이 얼마나 급하셨는지, 일주일 만에 이모부님은 집을 부수러 오셨다. 놀라운 건 집 안에 가구를 그대로 둔 채 벽을 부수고 공사를 한 덕에 옷장 속도 주방도 온통 공사 먼지로 가득 찼다.
공사는 한 달만에 끝났다. 한 달간 시댁에 들어가 살았다. 매일 밤 어머닌 아기를 데려다 재우시고, 잠이 든 다음 방으로 데려 오셨다. 엄마 놀이가 즐거우신 모양이었다. 하루는 아이에게 젖을 물려봐도 되냐고 물으셨는데, 너무 놀란 나는 진심으로 정색했고, 다행히 내 앞에서 시도하진 않으셨다.
집이 새 집이 되었다. 공사 기간 내내 나는 몰래 울었다. 이제 영원이 여기서 나갈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대체 나는 왜 이곳에 내 발로 들어온 걸까 자책을 시작했다.
#7. 나르시시스트는 사람들에 보이는 이미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안과 밖의 모습이 매우 다르고 밖에서의 모습을 자기 모습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아이들은 달라지는 부모의 모습에 혼란을 느낀다. 부모의 집안에서의 모습에 대해 비밀을 유지할 것을 강요받고, 아무 문제없는 척해야 하기 때문에 거짓말과 친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살아가게 된다.
현실 같지 않은 생활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이상해 하지 않았다. 그 세상에선 '나'만 이상한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집안에서의 일을 밖에 이야기하지 말라는 당부를 종종 하셨다. 부끄럽다고 했다. 나도 그랬기 때문에 친한 친구에게도 시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어머닌 내가 사회생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아이들은 엄마가 키워야 좋다며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길 권하셨다. 생활비가 부족하면 도와주시겠다고 하셨다. 이 말들은 일하는 내내 나에게 죄책감을 심어 주었고, 일을 할 때에도 일을 쉴 때에도 행복하지 않았다.
늘 나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는 어머니는 사람들이 있을 땐 다른 사람 같았다. 며느리 칭찬에 바쁜 어머니가 낯설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내 모습에서 어머니가 보였다. 사람들에게 행복한 모습만 보이려 노력했고 사랑받는 며느리를 연기했다.
어머닌 아버님에 대한 원망이 많았고, 자주 싸우셨다. 싸움의 주된 이유는 아버님이 매일 술을 마시기 때문이었다. 싸움은 갈수록 격해졌다. 스틸 재떨이에 아버님 머리가 찢어지기도 했고, 어머니가 손가락을 물어 살점이 반이나 떨어져 나오기도 했다.
자식에게만큼이나 손주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어머닌 매주 금요일에 아이들과 하룻밤을 지내고 싶다고 하셨다.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금요일이면 학원을 마치고 할머니 집으로 갔다. 금요일 하루를 잘 쉴 수 있어 나에게도 좋았다.
어느 금요일, 오랜만에 영화를 보러 나가던 길에 전화를 받았다. 아이들은 울고 있었고, 무섭다고 했다. 우리는 차를 돌려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 부모님 두 분은 싸우고 계셨다. 우리는 영화를 취소하고 다 같이 저녁을 먹었다. 손주들 앞에서 욕을 하며 싸우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에 대해 아이들은 무서웠다는 말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입은 연 건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2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아이들은 할머니가 왜 매주 오라고 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고 했다. 할머니는 자주 화를 내셨는데, 때로는 폭력을 쓰기도 했다는 것이다. 화가 났다.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때렸어?"
아이들은 할머니가 할아버지 머리를 잡아 바닥에 찍었던 일, 누워있는 할아버지를 식탁 의자로 내리치려고 했던 일을 꺼내놓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대체 이제 무슨 소리지?
"왜 그때 엄마한테 얘기 안 했어? 안 무서웠어?"
"무서웠지. 근데..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랬구나.. 그럼 너희들은 그때 뭐 하고 있었어?"
"방에 있거나, 그냥 티브이 보고 있거나."
알았다면, 절대 매주 아이들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2주 전 간성혼수로 보였던 아버지를 입원시키지 않았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어머닌 공기 좋은 곳에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병원과 한 시간 이상 떨어진 어머니의 시골집에 아버님을 모시고 갔다.
아버님은 배변 처리가 어려운 상태였고, 많이 혼나시는 것 같았다. 방은 너무 뜨거웠고, 아버님은 계속 주무셨다. 어머님은 아버님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상가를 처분해도 된다는 허락을 하라고 강요하셨다. 아버님은 알았다고 하셨다.
아버님의 정수리에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왔었다. 내 시선이 머문 곳을 따라간 어머니는 급히 변명을 했다. 아버님이 요즘 많이 어지러워하시고 쓰러지셔서 난 상처라고 했다. 낮은 탁자에 부딪혔다는 그 상처를 머리 정가운데에 있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웠다.
이미 정신을 차리기 힘든 상태의 아버님을 병원으로 모시자고 했다. 엄마가 알아서 하실 거라고 그냥 돌아가자고 하는 남자가 한없이 작아 보였다. 엄마를 무서워하는 85킬로의 남자는 그렇게 아버지를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아버지를 업고 나왔어야 했다.
우연히 나온 그 얘기는 놀랍기도 했지만 많은 감정이 동시에 올라왔다. 어머니에게 화가 났다. 늘 이해할 수 없는 분이었지만, 선은 있다고 생각했다. 손주들 앞에서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 아이들 아빠가 불쌍했다. 적어도 그때까진 연민이 있었나 보다.
아이들에게 아빠에겐 이 얘기를 하지 말자고 했다. 그래도 그 사람에겐 엄마니까. 결국 이 얘긴 내 입을 통해 남편에게 전해진다. 결혼의 끝은 연민도 배려도 없다. 상처 주기에 급급한 시간들이 끝난 지금의 생활이 그래서 나는 좋다. 속이 썩은 양파 같은 생활을 지속하면 결국 탈이 난다.
친구들은 나를 '전생에 나라를 구한 복 많은 아이'라고 했다. 아니라는 내 말도 겸손으로 보였거나, 배부른 소리로 전해졌다. 숨이 끊어질 듯 겨우 겨우 살아가고 있는 나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불행하다고 느껴지면 나는 가면을 더 단단히 썼다.
자라면서 부모님이 싸우는 장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남편에게 심한 욕을 하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다. 결혼 17년 만에 나는 울고 불고 남편에게 욕을 퍼붓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우아한 척하는 내가 싫었다. 점점 망가져 가는 모습이 수치스러웠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은 간단하다. 냉장고 문을 열고 - 코끼리를 넣고 - 닫는 것이다. 허무 개그스러운 이 해결책은 매우 논리적이어서 마음에 쏙 든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주방에 놓인 냉장고를 떠올린다. 코끼리를 축소시키거나 잘라야 할 것 같다. 저 질문 어디에도 냉장고의 크기를 말하지 않았다.
행복한 결혼을 꿈꿨고, 여전히 결혼은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믿는다. 나는 여전히 비혼주의자도 아니고, 이혼을 장려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결혼했다는 사실'이 내 인생을 어떻게 살지 결정하는 단 하나의 조건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을 할 뿐이다.
내가 들어간 방이 가스실이라면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죽어갈 것인가를 묻고 싶다. 먼저 '지금 행복 한지' 자신에게 묻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정말 그곳이 가스실이라면 당장 나와야 한다. 방법은 아주 단순하다.
일어나서- 문을 열고 - 나오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