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소 한 스푼

LANGUAGE/Moonshine

by 이탁

마음속 호수에서 냉소를 한 스푼 퍼내면 어떨 것 같은가? 투명할까?


명경지수라는 말마따나 마음이 마냥 맑다면,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흙탕물이다. 예쁜 것과 더러운 것들이 한 데 뒤엉킨, 갈색 빛깔이 감도는 웅덩이다. 흙이 많은지, 돌이 많은지, 아니면 곤충 사체가 많을지는 모르지만, 국자 안에 담긴 흙탕물은 세세하게 따져보면 다르다. 겉으로는 별 차이가 없을지 몰라도, 분명 그렇다.


냉소도 마찬가지다. 냉소 안에는 온갖 감정이 잠들어 있다. 분노와 비웃음, 자조, 슬픔 등, 그 모든 것 이상이 섞인 냉소는 흙탕물만큼 어둡고 복잡하다.


다만, 어떤 감정이 먼저 눈에 띌지는 모른다. 분노가 주가 되는 냉소라든지, 자조나 체념의 느낌이 강한 냉소라든지. 웅덩이 위에 어떤 건더기가 떠오르냐에 따라, 냉소의 성격은 결정된다.


단지, 무엇을 띄울지는 당사자의 몫이다.


랭귀지.png XXX - <LANGUAGE>

김심야는 <The Anecdote>의 유일한 피처링으로 이름을 알린 이후, 프로듀서 FRNK(프랭크)와 결성한 XXX를 통해 본격적으로 씬에 등장했다. 그로부터 약 9년이 지난 현재, 그는 동나이대의 한국 래퍼들 중에서 가히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LANGUAGE>는 그의 특색과 감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앨범이다. FRNK의 강렬하고도 공허한 전자 비트 위에서, 김심야는 차갑고도 격렬하게,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한다. 그 악감정은, 자신의 처지와 꼬인 음악 시스템, 그리고 가짜들을 향한다.


XXX의 1집 앨범 <KYOMI>로 화려하게 데뷔한 그는 씬의 루키로 이목을 끌었다. 리스너들의 박수갈채와 선배 뮤지션들의 엄지가 그의 눈에 펼쳐졌다. '드디어 해냈다!' 당시의 그는 이렇게 여겼으리라. 그의 상상 속 힙합씬과 음악계는, 한 번 히트하면 떼돈 벌 수 있는 금광이었으니까. 노후한 아버지의 차를 바꿔드리고, 이제껏 저질렀던 불효를 메꿀 효도도 하고, 충분히 그렇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머지않아 그는 가혹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명성은 당시 그 누구보다 드높았지만, 정작 그의 살림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기껏해야 아르바이트생 월급 정도의 돈이 은행앱에 찍혔으니, 아버지께 선물로 드릴 차는 꿈도 꾸지 못할 처지였다. 힙합이 그렇게 유행이라던데, 랩스타의 왕좌는 너무도 멀다. 미디어에 나가지 못하면 계속 이 처지에 머물 것이다. 이 와중에, 자신을 베낀 카피캣(Copycat)들과 줏대 없이 행동하는 래퍼들은 자기보다 훨씬 잘 나간다.


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모두를 비웃는 방향을 택했다. 별다른 철학과 개성 없이, 베끼고 파는 데만 집중한 래퍼를 거세게 비판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변변한 살림도 이어가지 못하는 본인의 음악도 별반 다르지 않다. 김심야 자신이 보기에는, 둘 다 하찮기 그지없으니까. 그런 그의 복합적인 심경은 음악에 녹아들어, 냉소라는 감정을 청각화시킨다.


지금까지 김심야를 주로 강조하긴 했으나, FRNK의 비트도 <LANGUAGE>의 완성도에 한 몫했다. 그 역시 김심야와 동일한 심정이었을까. 세련되고도 까칠하며, 호전적인 비트는 날카롭게 찌르는 김심야의 톤과 자연스레 어우러진다. 김심야가 없으면 XXX도 없지만, 김심야만 있더라도 XXX는 굴러가지 않는다.


하여튼 그의 냉소 어린 분노는 차갑게 가공되어, 적나라하게 비어진다. 이 감정에 닿은 이들은, 그 누구라도 신선한 충격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해당 앨범을 처음 접했던 필자 또한 그랬다. 이제껏 들었던 한국 앨범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앨범이다.


또라이도 아닌데 연예인도 아닌
음악 하는 학생 정도 명작들이나 정독
수작들은 작품으로 치지도 않지
그럼 내 건
내 건 인마 아무래도 개 좆같지
먹힐 듯 안 먹히는 뽐새는 애물단지
내가 이러고도 한국에서 뜨겠다는 놈이
도대체 쓰는 가사마다 반이 꼬부랑이냐

- <LANGUEGE>의 3번 트랙 <수작> -

좆같은 한국은 내 음악을 싫어해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좀 들여다보면 사실 또 알지
내 지루한 음악이 해답이니까

- <LANGUEGE>의 4번 트랙 <간주곡> -

Q_80,0 (1).jpg 김심야와 손대현 - <Moonshine>

한국계 미국인인 손대현과 결성한 그룹, 김심야와 손대현(Kim Ximya X D.Sanders)에서 그는 또 다른 형태의 냉소를 내보인다.


비록 <LANGUAGE>보다 1년 뒤에 발매되었으나, <Moonshine>은 서사 상으로 <LANGUAGE>의 다음 순서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LANGUAGE>와는 같은 방향성을 공유하나, 세세한 면에서 차이를 가져간다.


앞서 언급했듯, <LANGUAGE>는 여러모로 분노에 가득 찬 앨범이다. 이는 <Moonshine>에서도 동일하다. 해당 작품에서 그는 분노를 여과 없이 표출한다. 그러나, 더 차갑고, 차분하고, 자조적이다. FRNK가 연주한, 공격적이고 무감정한 전자음악과는 달리, 손대현의 비트는 잔잔하고도 유려하다. 그에 맞게, 김심야는 다소 지치고 체념한 듯한, 소위 말해 '현타'가 온 톤으로 앨범을 휘젓는다.


하지만, 비트가 바뀌어도 그의 뒤틀린 감정은 그대로다. 그리고, 여전히 그는 절제하지 않고 표출한다. 본인의 랩 스타일을 베낀 카피캣(Copycat)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돈을 벌지 못할 걸 알면서도 힙합을 포기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도 손가락질을 한다.


아이러니한 건, 은연중에 그는 자신의 길과 음악에 자부심을 드러낸다. 꼬박꼬박 앨범을 내지 않아도, 자신의 음악을 이길 음악은 어디에도 없다. 그저 본인의 뒤꽁무니를 따르며 돈 버는 음악만 있을 뿐. 이 점은 시스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이런 본인이 성공하지 못하는 시스템은 망가진 게 분명하니 말이다. 하지만 강하지 않고, 은은한 어조로 냉소를 이어간다.


그 외에도, 이 앨범의 한 가지 특징이라면, 다른 앨범보다 가사가 훨씬 간결하다. 첫 앨범인 <KYOMI>부터 최근작인 <w18c>까지, 김심야는 직설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작법을 지향하고 있다. 이전까지, 그리고 현재의 김심야는 일관적으로 무질서하게 어질러 놓은 듯한 가사를 사용하여 실험적인 분위기를 강조한다. 한 번에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가사가 바로 그가 생각하는 잘 쓴 가사이기 때문이다. 당장 위에서 소개한 앨범인 <LANGUAGE>를 조금 들어봤다면 알 수 있으리라.


하지만 <Moonshine>의 가사는 대부분 한눈에 이해하기 쉽다. 힙합 프로듀서인 세우(sAewoo)는 음악을 듣지 않고 가사만 봐도 이해가 되어야 잘 쓴 가사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번 <Moonshine>의 노래들은 가사만 읽어도 화자의 의도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본인은 '가사 쓰기 귀찮아서 대충 썼다'라고 표현했으니, 역설적으로 김심야의 탄탄한 작사 능력을 보증하는 앨범이라 할 수 있겠다.


위 모든 요소가 합쳐져, 김심야는 <Moonshine>에서 체념한 음악가의 냉소를 실감 나게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이번 엘범이 거의 완성되어가는 이쯤에
난 많은 생각을 업고 앞으로 가야하듯이 숨네
이 엘범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여기에 적지
나에게 미안하지만 사실 큰 이유가 없어서 벙찐

(...)

이딴식으로 써도 다음곡들은
너희에게 신나기를 빌어
들어주는 모두에게 감사를
근데 요즘 유행에
여기까지 들을 사람이
있을까 또 감사를

(...)

뭐 어찌되었든
내가 하면 그게 멋있을 때까지
So I mean
anyways
welcome to moonshine

- <Moonshine>의 1번 트랙 <Moonshine> -


냉소는 만사에 허무감을 느낄 때 고개를 내민다. 몇 번의 찰과상 정도는 버틸 만하다. 하지만 서서히 쌓이게 된다면, 곧 쓰라린 감각을 인식한다. 금방 눈치채지는 못하지만, 상처가 곪다 보면 알아채는 때는 곧 온다. 머지않아 흉터를 짚고 나서는, 마음속에 자리 잡은 냉소를 돌아보게 된다.


이윽고 숨결을 골랐다면, 사람들은 냉소를 쥐고 휘두른다. 누가 맞을지는 모른다. 사실 아무도 안 맞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저 휘두를 뿐이다.


지난 시간 동안, 김심야의 냉소는 모든 것들을 찔러 댔다. 거짓된 모습만 보이는 가짜들, 미디어에 침잠된 장르, 아직도 돈 안 되는 짓만 하는 본인까지. 그의 냉소는 이제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아직도 힙합이 유행인 줄 아는 병신들아 정신 좀 차려
지금 가장 뜨거운 건 랩이 아니라 SHOW ME THE MONEY

- Manual -

추천곡:


<LANGUAGE>

18거 1517

수작

간주곡

Trust Us

뭐 어쩔까 그럼

Told you


<Moonshine>

Moonshine

Process

Flowers

Dance

Money Flows

Comintoya (feat. ELHAE)

Outro


* 글쓴이의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되었습니다.

* 볼드체는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해당 앨범 최고의 곡입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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