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DARKROOM
어제 나는 조금 행복했다. 골칫거리였던 과제를 끝냈기 때문이다. 무려 15페이지에 달하는 과제를 끝마쳤으니. 이보다 기쁠 수 있을까.
그러나 오늘 기분은 별로 안 좋다. 아직 할 일이 산더미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음 주는 훨씬 바빠질 텐데, 어제 느꼈던 기쁨이 사치처럼 보인다.
곧 강의가 끝나면 머지않아 기분이 풀릴 것이다. 드디어 밥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을 거르고 나와서 좀 배고팠다. 무슨 메뉴를 선택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지금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 나는 누구일까.
개미를 대표하는 단어는 뭘까? 나는 개미 하면 '노력'이 떠오른다. 개미와 베짱이가 워낙 유명해야지. 물론 실제로 베짱이가 기타를 치며 다니지는 않지만, 개미는 정말로 열심히 사는 것 같다. 회색 보도블록 위에서 뽈뽈거리는 개미들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는 개미가 어떻게 사는지는 알지만, 개미굴 안까지 들여다보지는 않는다. 개미굴 내부는 복잡하고 어두우며 비밀스럽다. 어쩌면 개미들조차도 개미굴 하나하나 전부 알지는 못할 수도 있다. 옆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위층에서 어떤 일이 터질지 과연 다 알 수 있을까?
개미와 개미굴은 우리의 사회, 그리고 내면을 닮았다. 온갖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내 마음 역시 너무나도 복잡하다. 또한 쉽게 은폐되고 사라진다. 걱정 한 점 없이 밝고 도덕적인 사람마저도 진짜 모습은 어떨지 알 수 없다. 속으로는 울분을 삼키며 매일 병마와 씨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QM의 4번째 정규 앨범 <개미>는 과거 그의 염세적인 이면을 담았다. 부모님이 건강하길 바라면서도 유산이 얼마일지 기대하는 자기 자신, 그리고 타협과 인내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회, QM은 이 모든 것이 못마땅했다. 동시에,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나도 싫었다. 부모님이 늙어가는 모습이 걱정되었고, 곧이어 본인의 죽음이 두려워지기 시작한 지점이다. 시간을 이길 방법은 죽음뿐이었는데도.
이전 앨범들과는 크게 다른 무드지만, 문예창작학과로서의 경험 덕일까. 그는 문학적이고도 솔직한 가사로 새로운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이번 앨범에서 보여준 그의 다양한 랩은 QM의 기본기가 얼마나 탄탄한지 보여준다. 가사가 강점인 래퍼이긴 하지만 가사가 없어도 그의 랩은 일품이다.
이 앨범은 여러모로 QM의 이면과 닮았다. 소시민의 이야기를 풀어내지만 다소 희망적인 이전작, 미려한 가사. QM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시종일관 염세적인 서사와 강렬한 랩. 이미지에 가려졌던 그의 면모다.
씨발 살 좀 빼라, 거울이 싫을 때도
엄마 폰 배경 내 마른 사진은 녹슨 대못
이런 나도 사랑하라며 씨부렁거리지만 내가
날 사랑하지 않는 게 이 대화의 대목
- <개미>의 6번째 트랙 <개미굴> -
첫 발매 당시 <DARKROOM>에 대한 의견은 상당히 엇갈렸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기대를 저버렸기 때문이었다. 사이먼 도미닉(이하 쌈디)에게 바라는 모습이 해당 앨범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여러 매체에서 비쳤던 그는 어땠었나. 자신만만했고 외향적이었다. 또한 그의 랩은 듣는 맛이 탁월했다. 저음의 단단한 톤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멜로디. 쌈디의 가장 큰 장점이다. 거기다 당시 기준으로 데뷔한 지 10년이 다 돼 가던 배테랑이었다. 그런 래퍼가 드디어 첫 정규 앨범을 낸다니! 그 누가 기대하지 않을 수 있을까.
<DARKROOM>은 그랬던 그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묵직하게 때려 박는 랩이 아닌 정적이고 잔잔한 랩으로만 채워져 있고, 앨범의 색깔은 내내 어둡게 흘러갔다. 처음 들었던 이들은 적잖게 당황했을 것이다. '아니 이게 쌈디 앨범이라고? 왜?' 하지만 현재 와서 생각해 보면, 지극히 쌈디다운 앨범이었다.
그의 눈높이는 오랫동안 이센스와 박재범에 맞춰져 있었다. 옛 동료였던 이센스만큼 잘해야 하고, 공동대표였던 박재범만큼 근면해야 한다. 인간 정기석은 이 틀에 맞춰줄 수 없었다. 저들을 따라잡는다 해도, 압박감에 쫓기며 쟁취한 자리가 과연 달콤할까?
겉으로는 대범하던 그였지만, 결국 곪아터졌다. 가사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우울감이 쌓여 병을 앓기도 했다. 수 차례 마음의 병으로 고통받던 그는 더 이상 숨기지 않기로 다짐했다.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길이지만, 그보다는 자신을 챙겨야 했다.
그래서일까. <DARKROOM>의 한 켠에는 어둡고 이기적이지만 따스한 감성이 느껴진다.
DKRM, chillin' with my roomy
대장질은 지치지만,
머릿속에는 구니스
충성은 됐고, royalty나
똑바로 나누지
믿음의 무게를 덜은 발걸음
feel like I'm cruisin'
- <DARKROOM>의 9번째 트랙 <in my hood> -
하루가 지날 때마다 영혼이 바뀌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어제의 나는 화나 있었지만 오늘의 나는 행복했다. 내일의 나는 어찌 될지 알 수 없다.
내 사람들에겐 나름 친절하지만 그 외에게는 가차 없다. 방금 내친 저 사람과 친해진다면 태도가 바뀔 것이다.
과감하게 표현할 때도 있지만 다물 때도 많다. 위아래와 상황에 따라 다르다.
내가 내 주인이 아닌 것 같았지만, 머지않아 깨달았다.
낙관과 염세, 친절과 싸가지, 대범함과 찌질함, 결국 모두 나였다.
추천곡:
<개미>
입에총 (feat. 지코)
Bust down (feat. The Quiett)
나이롱
번데기 (feat. 카코포니)
개미굴
<DARKROOM>
정진철
데몰리션 맨 (Feat. 김종서)
in my hood
* 글쓴이의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되었습니다.
* 볼드체는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해당 앨범 최고의 곡입니다
* 한동안 브런치스토리에 글이 올라오지 않았었습니다.
두 가지 때문이었는데, 첫째로 노트북 액정이 고장나서 한동안 컴퓨터를 쓸 수가 없었습니다.
핸드폰으로 써도 되긴 하지만 제가 핸드폰으로 글 쓰는 솜씨가 썩 좋지 못합니다.
그리고 요새 너무 바빠서 글 쓸 타이밍도 잘 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바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꾸준히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제가 정해놓은 약속을 어기는 건 안 되죠. 꾸준히 약속을 지키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