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떡이 된, 수원왕갈비

by 홍승표

“홍 서기! 갈비 맛이 어때?”

촌놈 갈비구경 시켜준다고 저를 이끌고 간 계장이 허겁지겁 갈비를 뜯는 모습을 보고 한마디 던진 겁니다.

“네! 이렇게 맛있는 고기는 생전 처음입니다.” “그래! 많이 먹어”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며 저는 다시 정신없이 고기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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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너른 고을(廣州)촌놈이 청운의 뜻을 품고 수원으로 거처를 옮겼지요. 군청에서 함께 일하던 형이 도청전입시험을 권유해 시험을 치루고 경기도청으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수원에 와서 어쩌다 처음 먹어본 게 수원 왕갈비였지요. 사업소에서 도 본청으로 들어왔는데 계장이 마련해준 환영식 저녁자리가 소갈비 집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새로운 맛의 신세계를 경험했지요.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소갈비의 맛은 환상적이었습니다. 눈치를 살필 겨를도 없이 먹어대니 계장은 내심 지갑을 만지작거렸을 테지요. 스물일곱 청춘인 저는 수원갈비를 처음 만나 깊은 사랑(?)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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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한 번 갈비를 먹을 수 있었고 먹을 기회가 많지는 않았지요. 더구나 박봉에 외벌이었던 터라 갈비로 외식을 한다는 게 부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에도 외식메뉴는 돼지갈비가 대세였지요. 어쩌다 회식자리에서 소갈비를 먹을 때면 저도 ‘아들에게 소갈비를 사줄 수 있는 날이 오겠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승진을 하고 조금씩 여유가 생기면서 생일 같은 기념일엔 세 식구가 외식으로 소갈비를 먹을 수 있었지요. 속칭 왕갈비로 불리는 수원의 소갈비는 정말 다른 지역의 갈비보다 뼈대가 크고 살도 많습니다. 독특하고 맛깔 난 양념갈비 맛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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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갈비의 원조는 자타가 공인하는 '화춘옥'입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영동시장에서 영업을 시작했는데 늘 줄서서 기다려야 했다지요. 갈비 외에 갈비탕과 설렁탕을 함께 팔았습니다. 제3공화국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경기도청 순시나 지방 출장길에 화춘옥을 찾으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지요. 그러다 1980년대 우시장이 폐장된 후, 한우고기 조달이 어렵게 되자 점차 수입 소고기로 대체됐습니다. 수입 산으로 갈빗대가 커지고 고기 량이 늘어나 왕갈비로 불리게 된 것이지요. B 갈비 집은 1인분이 450g으로 어른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수원왕갈비를 먹기가 어려워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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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식당의 한우갈비가 10만2천원, 수입소갈비 6만9천원, S갈비는 8만7천원, B식당 수입소갈비도 6만5천원을 받습니다. 재료와 인건비가 워낙 올라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1인당 최소 10만원 넘는 비용이 적지 않게 부담이 되는 게 사실이지요. 일부 업소는 식사시간까지 제한하고 있습니다. 테이블 당 이용시간을 1시간 40분에서 2시간을 넘지 못하도록 한 것이지요. 평일 저녁뿐만 아니라 주말도 동일합니다. 한 팀이라도 더 받으려고 손님들에게 '카운트다운'을 강요한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지요. 양도 많고 맛도 좋아서 입 꼬리가 올라간다던 수원 왕갈비가 서민들에겐 그림의 떡이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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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넘게 수원에서 살고 40년 넘게 공직자로 일했지요. 집이든 직장이든 오는 손님에게 수원 왕갈비를 사드리면 대접받은 손님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니 기분이 좋아졌지요. 그런데 이젠 수원왕갈비를 대접하거나 사먹는 게 어려워졌습니다. 먹고 싶어도 사먹기 힘든 음식이 된 것이지요. ‘장사는 돈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원에서 가장 오래된 일미순대 집처럼 한 결 같이 진하고 넉넉한 인심이 넘쳐흐르면 좋겠지요. ‘안가면 된다.’고 위안을 삼기엔 40년이 넘는 지난추억이 짠한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비싸지고 시간제한까지 하는 수원왕갈비, 오래 사랑받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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