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폭탄주(爆彈酒)보다 과하주(過夏酒)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나는 불과 보름 전에 치과에서 어금니를 뺐다. 어금니가 흔들거린 지는 몇 년 되었지만 치통이 찾아올 때마다 잇몸치료도 받고 진통제도 먹으면서 ‘이빨아 우리 좀 더 같이 사이좋게 살자’고 살살 달랬다. 어금니를 뽑고 임플란트를 한다는 결정은 장고 끝에 이루어졌다.
치과에서 어금니를 뽑자, 뿌리가 깊었던지 어금니가 박혀있던 자리에 구멍이 뻥 뚫리면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지혈제를 적신 탈지면으로 구멍을 막아 꾹 눌러 물고 있었다.
“피나 침이 고이면 뱉지 말고 삼키세요. 항생제와 소염제는 마취가 깨면 복용하시고요.”
처방전을 쥐어주던 간호사의 주의사항에는 ‘금주(禁酒)’는 없었다. 환자에게 굳이 주의시키지 않아도 지구에서 태어난 인간은 발치 후에는 일정시간 당연히 금주를 한다. 자신의 몸에 대한 예의이다.
나는 적어도 겉모양새는, 발치 후에 피를 질질 흘리며 음주를 즐기지는 않을, 교양과 인품과 갖춘 여자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기에 의사선생님은 내게 금주 금연을 지시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피할 수 없는 모임이 있어 참석을 했다. 마취를 하고 발치 수술을 받았던 터라 속은 헛헛하고 피잉 어질증이 일어났다. 탈지면을 교체했지만 여전히 피는 멈추지 않았고, 또한 짭짤한 피와 씁쓸한 맛의 지혈제가 침과 함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모임이 파할 즈음에는 마취가 풀리면서 얼얼한 통증이 밀려왔고, 피를 많이 흘렸는지 갈증도 일었다. 물, 혹은 시원하고 청량한 음료수, 쌩맥주가 마시고 싶었다.
칵테일 바 ‘세라비’는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내가 참새라면 세라비는 방앗간이다. 저절로 발길이 닿았다.
내가 세라비의 목로에 앉자 바텐더 제임스는 “어서 와” 한마디를 하고 맥주잔 두 개에 맥주를 반쯤 붓고, 용량 30밀리 샷글라스에 위스키를 채워 뇌관으로 박았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세라비에서의 나의 첫 잔은 제임스와 함께 마시는 폭탄주였다. 나는 늘 그래왔던 대로 망설임 없이 더구나 갈급했던 터라 원샷으로 잔을 비웠다.
어라?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술의 맛이 비리고 짰다. 난생처음으로 맛보는 희한하고 기분 나쁜 맛이었다. 미각이 테러를 당한 기분이었다.
“크아... 제임스, 오늘 폭탄주 맛이 왜이래요?”
입 밖으로는 그렇게 뱉었지만 입안에 숨긴 말은 ‘경력 45년의 바텐더가 폭탄주 제조실수를 하다니’였다. 나는 내 눈앞에서 ‘뻥’하며 뚜껑이 공중으로 튀어 오르던 맥주와 ‘아다라시’라면서 마개를 개봉하던 ‘시바스 리걸’병을 바라봤다. 잘 못 되었을 리가 없다. 엎어 놓았던 맥주잔에 다른 음료 찌꺼기가 남아있을 리도 없다.
“뭔 소리야, 김 작가, 그런 소리 난생 첨 듣는구만. 우리 집 술맛을 타박할 양이면 여기 오지 말게나.”
나 원, 배짱도 유분수지. 장사치가 모태단골을 자를 생각하시네, 라고 군시렁거리다가 퍼뜩 내가 낮에 치과에 들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아, 내가 이빨을 뽑았구나 그것도 왕 어금니를. 어쨌든 나는 술과 함께 피에 젖은 솜을 꿀꺽 삼켰던 것이다.
“옴마 아까 낮에 어금니 뽑고 피가 나서 솜을 물고 있었는데, 피에 젖은 솜을 꿀꺽 삼켰나 봐요.”
이실직고 할 수밖에 없었다.
“흐흐, 안주가 짭쪼롬 했겠네. 한 잔 더 해요. 알코올은 소독제야.”
다시금 빈속을 훑고 내려가는 폭탄주. 목구멍을 따끔따끔하게 쏘며 내려간다.
“나만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난 폭탄주가 어떠한 술보다도 맛있어요. 왜 그럴까?”
내가 자문하듯 제임스에게 물었다.
폭탄주는 독한 술에 순한 술을 섞어 우리 몸에 가장 흡수되기 편안한 13도 내외의 와인과 같은 알코올도수를 가진 술이다. 술에 대한 경험이 없는 초보자들은 ‘폭탄’이라는 단어가 던지는 강렬함에 매료되어 호기심에 접근을 해보는데, 향기롭고 맛있으면서 편한 목 넘김에 홀딱 반해서, 폭탄주와 사랑에 빠지기 쉽다.
폭탄주는 짧은 시간에 알코올 흡수 속도를 촉진하여 속성으로 취하게 되는, 마초 같은 야성미 넘치는, 일테면 멋지지만 몹쓸, 나쁜 남자 같은 술이다. 폭탄주란 남자에게는 팜므 파탈이다. 달고 향기롭기만 한 감로수 인줄 알고 흠씬 취했는데 교미 끝난 수컷을 잡아먹어버리는 암사마귀 같은 술이다.
.
“지금 50일 지났으니 앞으로 315일 동안 더 금주하실 것인가요? 의사선상님께 허락을 받을래요?”
바로 보름 전에, 어금니 발치하고 폭탄주 마셔버린 사연을 이야기하며 최대표에게 물었다.
담배도 일 년 안 피우고 참으면 담배와의 이별에 성공한 것이다. 술도 일 년 절주하면 금주성공이라 쳐준다.
만약 사랑하는 애인을 일 년 동안 돌보지 않았다면 그녀에게 새 애인이 생겼다고 배신자라고 탓할 수 있을까.
“담배 끊으면 일망(一亡), 술 끊으면 이망(二亡), 연애를 끊으면 삼망(三亡), 밥을 끊으면 사망(死亡)이라던데, 이망까지 가겠다는 건가요? 내가 술 마시라고 해서 마시고 탈 나믄 내 멱살을 잡아 의사선상님께 재물로 바칠 투네요.”
에효... 내가 ‘술’ 대신 파견 나온 찐 악마인 가보다. 그가 대답을 못하고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한다. 핸드폰도 만지작거린다. 복강경 충수절제수술 50일 후 음주가 가능한지 갈등하고 있다.
(광주=연합뉴스):광주 북구 석곡동 무등산 자락 원효계곡에서 조선시대 선비들의 일상을 그린 `성산계류탁열도'가 재현돼 선비들이 탁족을 하고 있다 “서양에 폭탄주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과하주가 있답니다.”
드디어 나설 때가 되었다는 비장한 표정으로, 박작가가 들고 온 가방을 열어 한지로 포장된 병 하나를 꺼냈다. 언 듯 보아도 술, 전가의 보도처럼 내려오는 전통주 같다.
“이것이 과하주 (過夏酒)’라는 우리나라 전통 폭탄주입니다. 서양에서는 제정러시아 때 시베리아로 유형 간 벌목 노동자들이 추위를 이기기 위해 보드카를 맥주와 함께 섞어 마신 것이 폭탄주의 기원이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조선 초기부터 서울지방에 알려진 ‘과하주’라는 우리나라 식 폭탄주가 있었습니다.
서양식 폭탄주는 4.5도 발효주 맥주 150밀리에 40도 증류주 위스키 30밀리 잔을 빠뜨려서 제조한다면 우리나라 전통주인 과하주는 알코올 도수가 낮은 약주가 발효하는 중에 알코올도수가 높은 증류식 소주 원액을 첨가해 빚은 혼양주입니다.
도수가 높으면서도 부드러운 단맛을 함께 느낄 수 있으며 술 이름 그대로 ‘여름이 지나도록 맛이 변하지 않는 술’ 이라는 뜻을 담고 있지요. 발효주와 증류주의 단점을 보완하여 누룩과 곡식을 주원료로 술을 빚는 제조법은, 동양권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그 증거로 조선시대 부녀자를 위한 생활지침서인 <규합총서(1809년)>에 과하주의 제조 방문(方文)이 기록되어있지요. 크크크 오래 둘수록 그 맛과 향기가 진해져 술맛과 취흥을 돋운다는 과하주, 내가 우이동, 맑은 물 흐르는 냇가에 닭 잡아 놓으라 했으니, 탁족(濯足)*하러 갑시다.
지금쯤 우이동 계곡에서 닭집 주방장은 칼 들고 닭을 쫓고, 암탉은 죽어라 달리고 있을 겁니다.”
최시인이 쩝 입맛을 다시며 일어선다. 최시인의 금주결심을 푼 열쇠는 과하주일 것이다.
“참 잊을 뻔했는데, 내 고향 강원도 에서는 초복에 거미를 잡아 말려서 분말로 만들어 두었다가 감기에 걸렸을 때 그 가루를 먹습니다. 자아, 내가 최시인을 위해서 작년 초복에 잡은 거미를 말려서 빻아두었으니 과하주에 안주삼아 거미한줌 입에 털어 넣으쇼.”
나는 찐 악마의 명예를 박작가에게 넘겨야 할까보다. ♣
탁족(濯足)*:전통적으로 선비들의 피서법이다. 선비들은 몸을 노출하는 것을 꺼렸으므로 발만 물에 담근다. 발은 온도에 민감한 부분이고, 특히 발바닥은 온몸의 신경이 집중되어 있으므로 발만 물에 담가도 온몸이 시원해진다.
또한 흐르는 물은 몸의 기(氣)가 흐르는 길을 자극해 주므로 건강에도 좋다. 음식이나 기구로 더위를 쫓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더위를 잊는 탁족은 참으로 선비다운 피서법이다. 탁족은 피서법일 뿐만 아니라 정신 수양의 방법이기도 하다. 선비들은 산간 계곡에서 탁족을 함으로써 마음을 깨끗하게 씻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목배경사진설명: 이경윤(1545-1611)의 고사탁족도(高士濯足圖)
제목배경사진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다음글 : 23)기승전술,세라비! (起承轉酒, C'est la vie!)
[091/마지막 축배]
이전글 : 21)기승전술,세라비! (起承轉酒, C'est la vie!)
[081/ 폭탄주(爆彈酒)보다 과하주(過夏酒)]
https://brunch.co.kr/@32d909b3adb24f0/25
미래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