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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주 Jul 24. 2023

9. 은유적 사고, 정해진 용법을 벗어나다

한나 아렌트, 『발터벤야민』, 필로소픽

은유는 직접성 안에서 감각적으로 지각되고 아무런 해석도 요구하지 않는 연관을 확립하니까. (생략) 은유는 실제로 인식을 운반하는 시적인 요소이다. 은유의 도움으로, 감각적으로 가장 동떨어진 것들이 가장 정확한 조응을 이루게 된다.

(한나 아렌트, 『발터벤야민』, 필로소픽, 126p)




한나 아렌트는 발터 벤야민의 은유적 사고에 주목한다. 아렌트는 벤야민이 시인도 아니면서 시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은 그가 지닌 재능이자 우리에게 남긴 선물이라고 말한다. 나에게 철학은 개념과 정의로 이야기되는 학문이며 복잡하고 딱딱한 논리이다. 그래서 어쩐지 답답하고 다가가기 망설여진다. 그런데 벤야민의 철학은 시원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그의 은유적 사고가 개념과 정의로 포획된 관념들을 해방하기 때문에 그의 글을 읽는 독자 역시도 그 해방감을 맛보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개념화, 정의를 지어 구획하려는 태도가 내가 가장 떨쳐버리고 싶은 글쓰기의 방식이기 때문에 벤야민의 방식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거일 수도)


벤야민은 산책자처럼 도시를 돌아다녔고 수집가처럼 파괴된 조각을 주웠으며 몽타주 기법으로, 때로는 은유적 사고를 통해 파괴된 파편들 사이에 난 길을 걸어간다. 이 모든 게 그가 당대의 현실을 보여주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가 주운 파편은 과거의 조각이지만 그가 만들어내는 길은 현재에 있다. 그는 그가 주운 파편들이 기존에 봉사하고 있던 맥락들을 후후 털어버린다. 맥락을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은유적 사고를 통해 다른 조각과 붙여냄으로써 새로운 길을 보여준다. 어쩌면 벤야민에게 은유적 사고는 새로운 길을 보여주기 위한 파편의 접착제였을지도 모르겠다.


현대에는 은유적 사고를 보기 드문 것 같다. 일상생활에서 시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도 많이 보지 못했으며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나 글을 보면 느끼하다는 핀잔을 주기 일쑤이다. 시집을 읽는 사람들도 이제는 갬성충이라던가 매니아틱한 느낌이 든다. 


우리는 이런 은유적 사고에서 왜 멀어졌을까? 개인적으로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두 단어의 관계를 파악하려는 행위 자체가 귀찮은 과정이다. 면밀한 관찰과 내 안에서 연결되는 지점을 응시하는 인내심같은 게 필요하니까 말이다. 


또 한편으로는 독해해낼 수 있는 무한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세상을 파악할 때 정해진 용법에 따라 이해하는 일에 더 익숙하다. 그게 안정적이고 쉽기 때문이다. 이런 귀찮음과 두려움이 은유적 사고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 같다.


하지만 은유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하나의 생존방식이자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 구획되지 않은 것들, 그러니까 내가 관념화하고 개념화하지 못한 두려운 것들을 마주하는 힘으로서의 생존방식 말이다. 


 앞서 연재글에서도 여러 번 말했지만 자본주의는 사물로 하여금 하나의 맥락(유용성)만을 갖도록 하는 강요의 힘인데, 은유적 사고는 대상에게 부여된 하나의 맥락에서 벗어나 여러 맥락을 부여할 수 있는, 권위에 대항하는 힘이자 창조의 힘인 거다.


벤야민의 은유적 사고는 보여주지만 말하지는 않는 방식이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보여줄 뿐 무언가를 말함으로써 그곳으로 오라고 설득하지 않는다. 각자가 독해해야 할 몫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스스로 읽어낼 수밖에 없는 방식을 계속 눈 앞에 가져다 주는 벤야민의 책을 읽고 있으면 장난감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어린아이가 된듯한 느낌을 받는다. 다소 모험적이고 그만큼 나의 힘으로 더듬어 가야하지만 벤야민과의 산책은 그만두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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