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그램 질로크, 효형출판
벤야민은 어린아이의 시선을 통해서 자신의 유년시절을 회고한다. 어른의 시선은 도시와 사물에 질서와 체계를 부여하고 우월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반면 아이들은 도시, 사물과 독특한 관계를 맺는다. 여기서 독특한 관계라 함은 성인이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 부여한 질서와 체계를 해체하고 세계와 상호적이며 비위계적인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대상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것에 몰두할 때 가능하다고 한다. 이런 독특한 시선에서 세상과 관계를 맺을 때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하고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억된 어린아이는 상품의 운명으로부터 일상용품을 해방시킨다. 어린아이는 잃어버린 시절에 대한 어른의 기억을 보완하는, 잃어버린 사물들의 발견자이며 보존자이다. 어린아이는 탁월한 도시 고고학자이며, 구원의 이미지이며, 알레고리 작가의 알레고리이다. 도시의 어린아이에 대한 벤야민의 글과 벤야민의 회상 행위는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기억의 재구성이며, 수집가의 재수집이며 구원하는 인물의 구원이다.
『발터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181p, 그램 질로크, 효형출판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경계를 만들고 공간을 구획한다. 경계가 생기고 공간이 나누어지면서 관계는 단절된다. 각자의 공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물건의 경우에는 하나의 정해진 용도가 생기는 것이다. 즉, '상품'이라는 하나의 목적에 종속된다.
반면 어린아이의 세계에서는 물건이 상품의 목적에 종속되지 않는다.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어렸을 때를 생각해보면 도구를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다. 집안에서 야영을 하는 놀이를 하기 위해 식탁과 의자는 텐트가 되었고 이불은 텐트를 덮는 천으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아이들은 본래의 도구를 정해진 용도에서 벗어나게 하는 시선과 상상력이 있다. 대상과 다양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벤야민은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베를린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이 사랑하는 베를린을 구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단절되고 각자의 구역이 정해져버린 베를린을, 물건들이 상품의 가치만을 지니게 되어버린 베를린을 말이다.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가치로 굳어져가는 베를린이 다른 가치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벤야민과 베를린의 관계를 다르게 생성함으로써 말이다.
우리는 익숙하고 안정된 것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무언가 모른다는 점을 인식할 때 당황하고 불안해한다. 때문에 질서를 부여하고 인식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드는 것 같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우위에 위치하고 있다고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벤야민에 따르면 이런 관계에서 우리는 하나의 관계 밖에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쯤 쓰고나니 조금 안타까워진다. 질서와 체계 속에서 안정을 느끼는 대신 대상과 여러 관계를 생성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내 인생이 단조롭다고 느껴졌는데, 프루스트는 이를 시간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벤야민은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해 그 시간들을 어린아이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고 재구성해낸다. 그처럼 나 역시도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한 허무함을 구원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동안 내가 세계와 맺고 있었던 단조로운 관계에서 벗어나 또 다른 관계를 생성해냄으로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