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람 속 소백산 완주기|무박산행

by 해윤이

새벽 3시 56분,

소백산국립공원 문이 열리기도 전에 산행이 시작되었다.

이번 코스는 죽령에서 출발해 연화봉–천동삼거리–비로봉–국망봉–고치령까지 이어지는 24.8km 무박산행이었다.


죽령에서 임도로


죽령에서 약 4.5km 구간은 임도였다.
눈이 많지 않아 아이젠 없이 걷기 시작했지만,
조금 오르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눈은 모자와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다.

공지 문자에는


"날씨 맑음, 영하 10도, 체감온도 영하 16도, 바람 5m"


라고 적혀 있었지만, 눈송이는 점점 굵어졌다.


임도라 쉽게 오를 거라 생각했는데,
선두에서 걷던 내가 뒤처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했다.
내 몸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천문대 구간이라 길은 깔끔했지만,
내리는 눈과 블랙아이스 때문에 바닥은 미끄러웠다.
결국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아이젠을 착용했다.


“너무 힘들어서 못 걷겠어. 천천히 가자.”


앞서가던 대원 중 한 명이 팔을 다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말을 듣자 발걸음이 더 조심스러워졌다.


제2연화봉으로 방향이 꺾이자 임도는 끝나고,
넓은 눈밭이 나타났다.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눈은 더욱 거세게 날렸다.


그 와중에도 쏘는 눈 위에서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순간, 모두의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발걸음이 무거웠다.
몸 상태가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백산해무리


제1연화봉으로 오르는 길은 환상적이었다.
검은 능선 위로 붉은빛이 번졌다.
나는 그저 서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동쪽 하늘이 천천히 갈라지고 있었다.
지구가 조용히 뒤집히는 순간 같았다.

구름 그림자가 그 위를 재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소백산 해무리


나는 멈춰 서서 한참 넋을 잃었다.

후미대장이 말했다.


“빨리 올라가야 정상에서 일출을 볼 수 있어요!”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장갑 낀 손을 움직여 사진을 찍을 때마다
손가락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시렸다.


소백산 해돋이


거대한 해무리가 하늘에 걸려 있었다.
그 아래에서 태양이 솟아오르는 순간,
눈부심 속에서도 가슴이 차올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소백산 풍경


산장으로 향하는 동안, 반대편 하늘은
민트색과 핑크빛 해무리가 설산과 구름이 한데 어우러져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산장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추위가 스며들었다.
보온병 속 물은 이미 미지근했다.

그곳은 단지 바람을 막아주는 공간일 뿐이었다.


간식을 먹고 다시 밖으로 나오자
손가락이 시려 눈물이 났다.


“빨리 걸어요. 몸을 데워야 손이 안 시려요.”
나는 고개만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소백산 상고대

37년 전,
눈이 가슴까지 차오르던 날 이곳에 왔던 기억이 상고대를 보며 어렴풋이 떠올랐다.



소백산

비로봉으로 향하는 길은
바람이 너무 거세 나무조차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그 자리를 버틴 주목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상에 올라 사진을 찍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파란 하늘 아래 끝없이 이어진 산맥.


나는 외쳤다.


“소백산은 언제 올라와도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철제 다리를 건널 때는 아이젠이 틈에 끼어
뛰어넘을 수조차 없었다.
칼바람 속에 얼굴은 금세 빨갛게 부어올랐다.


소백산


국망봉으로 향하는 길, 눈은 허리까지 쌓여 있었다.

소백산의 거센 바람은 우리를 쫓아오지 못하고 멈춰 서서 배웅한다.

겨울 산행의 즐거움이 이런 순간에 있다.


왼쪽 스틱이 눈 속에 깊이 박혔다.
그리고, 뚝.

짧고 단단한 소리.
순간 균형이 무너졌다.


그리고 함께 떠오른 기억 하나.
차가운 의자, 낯선 형광등 불빛, 경찰서 조사실.
그날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억울함과 분함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결국 삼켜야 했다.


바람이 더 거세졌다.
손끝 감각이 사라졌다.
산은 침묵했다.



“아이고, 스틱이 부러졌네. 어떻게 걸을 거야?”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순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그저 이 눈 속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조금 더 걷자 눈은 사라졌지만,
낙엽 아래 얼음이 숨어 있어 더 조심스러웠다.
약 10.5km는 눈 없는 길이었다.
오히려 더 지루했다.


천천히 걸으며 생각했다.
오늘 나는 왜 이렇게 힘든 걸까.
전날 감기 기운을 느껴 비탈길을 뛰며 땀을 냈던 것이
허벅지 근육통으로 이어졌고,
그 여파가 24.8km 산행을 더 버겁게 만들고 있었다.


소백산 눈길


발걸음을 옮기며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끝까지 가야 한다.”


눈부신 설산과 바람,

그리고 지난 기억들이 뒤섞인 길 위에서
또 다른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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