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전철에서 만난 37살 청년

by 해윤이

서울역을 가기 위해 전철을 탔다.
새벽이라 그런지 전철 안은 유난히 차가웠다.


자리를 옮겨 중간쯤에 앉고 싶었다.


산모석 옆, 시커먼 점퍼를 입은 젊은 여성 옆자리에 앉았다. 한 정거장이 지나자 그녀는 조용히 화장을 시작했다.

문이 열리고, 베이지색 바지에 흰 패딩, 목도리를 두른 50대 후반쯤의 여성이 급하게 들어와 내 왼쪽에 앉았다. 짧은 커트머리에 짙은 눈썹, 핑크색 립스틱이 눈에 들어왔다.


맞은편에는 더부룩한 긴 머리에 검은 안경을 쓴 여성이 눈을 감고 있었고, 그 옆으로 검은 옷을 입은 남성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내 오른쪽의 젊은 여성은 계속 가방을 뒤적이며 화장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전철 안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키가 큰 한 장애인 청년이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물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누군가 자리에 앉으려 하자, 청년은
“내가 앉을 거야. 비켜.”

하며 그를 밀었다. 남성은 웃으며 자리를 양보했다.


청년은 어눌한 말투로 물었다.
“이거 노량진 가는 전철 맞아요?”


왼쪽에 앉은 여성은 모른다고 했다.
나는 그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네, 맞아요.”


그러자 옆자리 여성은 청년에게 자리를 바꾸자고 했고, 나는 청년과 나란히 앉게 되었다.


청년은 내게 휴대폰을 내밀며 물었다.
“노들역 가는데, 노량진에서 갈아타는 거 맞아?”


나는 내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뒤 말했다.
“조용히 앉아 있으면 내가 내릴 때 알려줄게요.”


조금 전까지 흥분해 보이던 청년은 그 말에 금세 차분해졌다. 전철 안도 다시 조용해졌다.


청년은 갑자기 가방을 열어 보였다.
유치원 아이들이 풀 것 같은 학습지 여러 권과 다이어리, 노트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중 한 권을 꺼내더니 내게 말했다.


“나 이거 어려워. 가르쳐줘.”


우리는 어느새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 있었다.


사다리 타기 문제였다.


“연필 있어?”


청년은 가방을 한참 뒤졌지만 연필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핸드백에서 볼펜을 커내고 종이를 달라고 했다, 청년은 A4 용지를 한 장 건넸다.


나는 종이에 사다리를 그려가며 방법을 설명했다.


“내려가다가 막히면 옆으로 가고, 또 내려가다가 막히면 그쪽으로 가는 거야.”


세 번쯤 설명하자 청년이 말했다.
“아, 재밌다. 내가 해볼게.”


청년은 천천히 선을 따라 내려갔다.


“여기서 옆으로 가고… 또 내려가고…”


마침내 문제를 풀고는 환하게 웃었다.

나도 공부방아이들을 가르쳐주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종이를 조심스럽게 접어 가방에 넣은 뒤, 이번에는 휴대폰 케이스를 보여주었다. 누런 종이에 이름과 전화번호, 보호자의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우리 엄마가 써줬어.”


나는 물었다.
“몇 살이야?”


“37살.”


“결혼했어?”


“아니. 아버지 돌아가셔서… 못 했어.”


“그렇구나. 일은 해?”


“아니. 돈은 엄마가 벌어.”


그 말을 듣는 순간, 그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젊은 시절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이 가슴 깊이 와닿았다.
아이들이 아무 탈 없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리고 이 청년의 어머니는 얼마나 긴 시간을 버텨왔을지.


생각에 잠겨 있는 나에게, 청년이 핸드크림을 짜서 내 손 가까이 내밀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오늘 핸드크림 안 바르고 나왔는데, 고마워!”


청년은 환하게 웃었다.
“이거 우리 엄마가 사줬어.”


나는 손등에 묻은 향을 맡으며 말했다.
“향기 정말 좋다. 엄마가 좋은 걸 골라주셨네.”


청년은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전철은 노량진역에 도착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서 내리면 돼.”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문이 닫히고, 전철이 다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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