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봉-하늘로 향하는 문을 지나

백두대간 1구간 지리산 천왕봉

by 해윤이

천왕봉은 지리산의 주봉이자 정상이다. 그리고 백두대간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백두대간 1구간은 지리산 성삼재에서 시작해 천왕봉을 거쳐 중산리로 내려오는 코스다. 지리산을 종주하는 코스 중에서도 가장 긴 축에 속해, 몸이 어느 정도 단련된 뒤에야 비로소 오를 수 있는 길이다.


산행코스 : 성삼재 ~ 삼도봉~ 연하천~ 백소령~세석~ 장터목 ~ 천왕봉~ 중산리

총 거리 36km

소요시간 :14시간 00분


우리는 두 팀으로 나뉘었다. 화대종주팀과, 성삼재에서 올라 천왕봉에서 중산리로 내려오는 팀. 나는 후자였다.

새벽 3시. 국립공원 통제가 풀리는 시각이다. 등산객들에게는 일종의 해방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 다들 힘차게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천천히 걸어도 성삼재에서 오르는 길은 숨이 탁탁 막혔다.


노고단 통제센터에 도착했을 무렵, 화엄사 방향에서 올라온 사람들과 뒤엉키며 조용하던 지리산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 더 걸었을까. 멀리서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지리산


야간산행의 묘미가 바로 이것이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지리산의 웅장한 능선. 그 풍경 앞에서 온몸이 조용히 감동하고 있었다.


노루목쯤에서 날이 완전히 밝았다. 헤드랜턴을 정리하며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은 저마다 식수를 보충하고 있었다. 지리산 종주의 좋은 점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능선을 따라 여덟 군데에서 물을 보충할 수 있다. 덕분에 무거운 물을 잔뜩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


멀리 이어지는 능선들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등산로 옆으로는 얼레지꽃이 수줍은 듯 피어 있었다. 군락을 지어 고개가 흔들리는 보랏빛 꽃들이 마치 우리를 응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리산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전망을 한없이 만끽하며 걷고 또 걸어, 장터목 대피소에 닿았다.

거기서부터 천왕봉까지는 길이 달라진다. 골고다 언덕을 연상시키는 험한 바위 비탈길. 숨을 고르며 한 걸음씩 올라, 마침내 통천문(通天門)을 지났다. 말 그대로 하늘로 향하는 문이다. 그 문을 넘어서자 천왕봉이었다.


통천문(通天門)

따사로운 햇살, 파란 하늘, 그리고 천왕봉에서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지리산의 장엄한 능선들. 한국인의 기상이 이 땅에서 비롯되었음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 풍경을 놓칠세라 카메라에 사진과 영상을 가득 담았다. 그런데 조금 지나자 하늘이 흐려지더니, 사방에서 안개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산이 스스로 문을 닫는 것처럼.

우리는 발걸음을 돌렸다.


중산리로 내려가는 너덜바위 길은, 올라오며 느꼈던 아름다운 풍경의 기억을 지워버릴 것만 같았다.


지루하고, 길고 긴 너덜길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바위에 무릎을 부딪히기도 하고,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내리막을 걷고 또 걸었다.


지리산 너덜길

그렇게 36킬로미터, 13시간. 지리산 천왕봉 종주가 끝났다.


그날의 기억은 분명 엄청 힘들었다. 숨이 막히고, 다리가 무겁고, 끝이 보이지 않던 길. 그래서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시간이 지나면 이상하게도 다시 그 길이 떠오른다. 여명이 밝아오던 능선, 얼레지꽃이 흔들리던 길, 그리고 통천문을 지나 마주했던 그 풍경.


아마도 나는, 힘들었던 산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힘든 삶의 무게를 조금씩 지워주던 지우개 같았던 산길의 순간들을 기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또, 그 힘든 산을 다시 찾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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