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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e Oct 31. 2023

한여름의 크리스마스이브, Coogee to Bondi.

2016.12.24.


What are you going to do today?


 오늘도 미소를 띤 James 할아버지의 질문으로 하루가 시작됐다. 요 며칠 행적으로 보자면 당연히 'Go look a house'라 답했겠지만, 나의 뜻밖의 대답에 James 할아버지는 '오 맙소사!' 하는 표정과 함께 웃음을 내비치셨다. 나의 대답은,


Today, I'm going to Coogee beach!
 and then I'm going to walk along with the beach line.


 할아버지는 "Right now? oh..(laugh)"하며 되물으셨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봐주시기로 했는데, 이 정신없는 친구가 뜬금없이 Coogee beach를 외친 상황이 많이 당황스러우셨을 것 같다.

 갑작스럽고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계속 보완해도 부족할 이력서와 커버레터, 게다가 하던 일을 마무리짓지 않고서 다른 걸 하는 그 찝찝함이란…. 하지만 살면서 언제 한 번 한여름의 크리스마스이브를 구경하겠냐는 호기심이 발동하고 나서는 해변은 꼭 가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풍문으로 들었던 '비키니 산타(!)'에 대한 기대감 역시 나를 해변으로 가기에 넛지(nudge)해주었다.

 James 할아버지는 내가 방을 나설 때부터 따라오시더니 자신이 Coogee beach로 갔을 때 탔던 버스정류장까지 배웅을 나오셨다. 정류장으로 가면서는 '걷는 것만큼 건강한 게 없다' '모르겠으면 'way to Bondi'만 물으면 된다'라든가 '오르막이 힘들긴 할 테지만 자기도 했으니 문제없을 거다'라는 말도 아끼지 않으셨다. 정류장까지 한 블록 정도 남짓 남았을까? 그즈음 손짓으로 오른쪽을 가리키시며 James 할아버지는 백패커로 돌아가셨고, 나는 감사인사를 전한 뒤 정류장으로 향했다.


 호주에 와서는 주로 Train을 이용했는데, 이번 Coogee beach를 가보면서 처음으로 버스를 타보게 됐다. 단 한 번의 경험으로도 버스보다는 트레인을 이용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는데, 여기 버스에서는 우리나라처럼 안내 방송이 나오지 않았다. 정류장을 그냥 휙-휙- 지나치는 버스의 모습을 보며, 재빨리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구글맵을 확인했다. 실시간 나의 위치를 추적하며 언제 내릴지 가늠하고 있는데, 몇몇 사람들이 내리기 전 버스 하차벨을 누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음 졸이며 구글맵을 보다 보니 어느덧 Coogee beach에 도착했다. 앞서 걱정과는 달리 하차벨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버스에 탄 거의 모든 사람이 그곳에서 내려서 나도 따라서 버스에서 내렸다.


처음 와본 곳이지만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전경 in Coogee beach
드디어 도착한 Coogee beach!

한여름의 크리스마스이브라니…


 그냥 해변일 수도 있지만, 무언가 다르게 보이고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한여름의 크리스마스이브, 한국이었다면 꽁꽁 언 겨울 날씨에 <나 홀로 집에>와 함께 맞이했을 텐데, 한여름의 한복판 해변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니…. 난 수영이나 해수욕을 하지 않아서 신발 벗고 모래 위를 잠시 걷다가 'Coastal walk'로의 행진에 돌입했다.



Coastal walk from Coogee beach to Bondi. Google maps.


 혹시나 길을 잃을까 걱정되어 미리 루트를 알아봤는데, 막상 가보니 어려울 게 없었다. 말 그대로 해안선을 따라서 쭉 걷기만 하면 되었으니 말이다. 완주가 목적이기는 하나 기록을 위한 경주도 아니었으니 되도록 바다, 주변 풍경을 마음과 사진으로 담으며 걷기로 했다. 복병이라면 한여름의 바닷가는 생각보다 훨씬 더 끈적였고, 나 정도는 손쉽게 태울듯한 강렬한 햇볕과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오르막 길은 여정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예고해 줬다.


해안로 시작점에서 만난 절벽 / 바위에 집중할까 하늘에 집중할까 고민되던 사진
절벽 끝에서 찍을까 싶었지만 사실 앞에 펜스가 쳐져있음. / 사진 찍을 떄라도 웃자며 남긴 셀카


 가는 길이 어렵지는 않았는데 갑자기 갈래길이 났을 땐 멘붕에 빠졌다. 마침 덩치가 마동석급인 구릿빛 피부의 선글라스를 낀 외쿡 남자분이 바다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됐다. 날은 덥고 여기서 어서 탈출하고픈 마음에 쑥스러움은 잠시 잊고서 그분에게 말을 걸어보고 심지어 길을 물어보기로 했다.


"Excuse me…"


 떨리는 마음으로 인사를 건넸는데, 구릿빛 마동석분은 언어사용에 어려움이 있는 분이셨다. 게다가 선글라스를 벗고 나니 웃는 입모양과는 상반된 한쪽 눈도 불편하신지 찡그리고 있는 모습에 눈이 갔다. 처음의 두려움은 온데간데없고, '덩치가 산만하니 무섭고 불친절할 수 있어'하고 가졌던 편견에 스스로 찔려 뜨끔하기도 했다.

 그분은 어떻게든 설명해주려 하셨지만, 병원에서 실어증 환자분들과도 의사소통하던 내게도 어려움이 있을 정도여서 양쪽 다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구릿빛 동석님은 양 손짓 발짓을 하시다가 바닷가 가까운 쪽 말고 차가 여러 대 세워진 방향 쪽을 가리키며 어렴풋이 'bon.. di! bond. i!'라고 말씀해 주셨다.

 진작에 지도앱보고 따라가면 될 거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구글맵을 봐도 갈래길 중 어느 개 더 나은지는 안내해주지 않아서 궁여지책으로 말을 걸어본 것이다. 달리 방도도 없었기에 믿어보며 고개를 돌려 몇 번의 Thank you를 연발한 뒤 그 길로 나섰다. 끝내 못 미더우셨는지 그때까지도 멀찌감치서 사라지지 않았는데, 갈림길에서 왼쪽 길을 택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감사한 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줄지어 세워진 차들 옆을 따라 걷고 있는데, 이번에는 길이 나뉜 것은 아닌데 보수공사라도 하는 것인지 경고문과 함께 아예 길이 막혀있었다. 걸려있는 플래카드를 살펴보니 왼쪽으로 가면 우회로가 나있다는 거 같아서 거기로 향하려는데 눈앞에 진풍경이 펼쳐졌다.

 

 이곳은 'Waverly Cemetery'. 여태까지는 주로 온 가족이 해수욕을 즐기는 모습만 보다가 눈앞에 펼쳐진 공동묘지 앞에서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이곳, 누군가에겐 안식처일 수도 있으니 왠지 사진 찍기도 조심스러웠다. 그렇다고 슬픔으로만 도배된 그런 곳은 아닌 거 같았다. 나 같은 여행객도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표정도 내가 생각했던 심각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물론 그분들이 가족인지 모르는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문득, 이곳에 안식하고 계신 분들과 이곳을 찾을 그 가족들은 해변이 가까워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눈앞에 바다뷰라면 여기도 엄청 비싸겠구나 하는 자본주의적 발상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Waverly Cemetery'라고 한다. 'cemetery'는 '묘지'라는 뜻 / 바다를 향해있는 누군가의 천사 석상.


 뜨거운 햇빛과 길어지는 여정 앞에 본래 계획인 풍경을 마음에 담는 것은 고사하고, 얼른 Bondi beach에 도착이나 했으면 하는 바람만 남게 되었다. 목적이 목적이 달성으로 바뀐 뒤 더 빠른 걸음으로 가다 보니 금세 Bondi beach에 도착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누군가 쓴 '카더라 포스팅'을 보니 본다이 비치에 가면 파도소리가 '본다이~... 본다이~...♩'라고 한다는 게 아닌가? 도착하자마자 그렇게 들리는지 귀 기울여봤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Bondi*라는 단어는 호주 원주민인 Aborigine언어로 '바위가 부서지는 파도'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Coastal walk의 시작점이었던 Coogee beach에서 Coogee**는 Aborigine언어로 'Smelly palce' 'The smell of the seaweed drying'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 Bondi beach _참조 : 'bondi beach' <Wikipedia>,

* Coogee beach _참조 : 'coogee beach' <Wikipedia>


희한한 해안선 / 희한한 바위 / 멀찌감치 보이기 시작했던 Bondi beach
제대로 본 게 맞나 싶던 외발 갈매기. 얘 처지를 보니, 양팔, 양다리 다 있으면서도 나는 왜이리 처량할까 생각했던.


'trash'는 명사로 '쓰레기'지만 동사로는 '부수다; 엉망으로 만들다;(필요 없는 것을) 버리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Bondi beach에 도착하며 아침부터 시작된 Coastal walk trekking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호주를 오고 나서 참 많이 걷는다는 생각이 든다. 길을 헤매서 걷기도 하고, 차비 아끼려고 걷기도 하고, 이제는 자발적으로 땡볕 아래서도 걸었으니 말이다. 해안산책로를 거닐며 봤을 때 주로 가족 단위 여행객이 많이 보였고,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인지 수영복 차림에 산타모를 쓴 사람이 간간이 보였다. 사람도 워낙 많아서 발 담그기는 미루기로 하고, 잠시 모래사장을 걷다가 돌아가기로 했다. 아참! 기대했던 비키니 산타는 찾지 못했다.


'어디 계십니까? 비키니 산타님'


 모래사장을 나온 뒤 발을 씻고서  곧장 Central로 가자니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먹자니 관광지라 많이 비쌀 것 같고, 패스트푸드점은 또 악몽이 재현될까 두렵고, 이번엔 시티에 한식당이나 가볼까 하며 블로그 검색 삼매경에 빠진 채 버스정류장을 향했다.


끼이이익-!


폰을 보고 있다가 싸한 느낌에 멈춰 섰는데 왼쪽 정강이 한 팔 정도 거리에서 스포츠카 한대가 급하게 멈춰 섰다. 드라마 보면 트럭이 달려오며 경적을 울려도 피하지 못하는 게 이건가 싶기도 하고, 이미 늦은 '아뿔싸!' '목숨은 건졌구나' 싶다가도 이제 운전자한테 쌍욕 먹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달리 차에서는 조용하고 오히려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한 손으로 지나가라며 손짓하고 있는 게 아닌가? 개인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또 다른 컬처쇼크를 맛본 순간이었다. 아무튼 한국이든 호주든 도로 건널 때 휴대폰은 정말 조심해야겠단 생각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정말 뜨거웠던 반나절을 보내고 난 뒤, 드디어 James 할아버지의 이력서 교정시간이 되었다. 마치 면접을 기다리는 것처럼 저절로 쭈뼛쭈뼛해지고 내용을 보실 걸 생각하니 민망함에 얼굴도 푹 숙여졌다. 훑어보시더니 실시간으로 긴장되는 첨삭시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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