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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e Nov 02. 2023

미리 크리스마스 선물, 뜻밖의 초대장?!

2016.12.24.


 재판정에서 선고를 기다리는 마음이 이러할까? 말을 할 듯 말 듯 노트북 속 내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뚫어져라 보고 계신 James 할아버지의 표정에 촌각을 세우고 있었다. 원어민에게 영어교정을 받다니! 횡재라 외치면서도 마치 비밀 일기장을 내보이는 것처럼 마음속에서 민망함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했다.

 James 할아버지는 실시간으로 첨삭을 해주시며 본격적으로 교정에 들어갔다. 예를 들어 내가 쓴 'lately arrived in Aus'라는 부분을 'recently arrived in Australia'식으로 바꿔주셨다. 몇 가지 이력서 팁도 알려주셨는데, 먼저 '비자 타입과 유효기간'을 먼저 알리라고 하셨다. 중간중간 콤마나 기호 사용에 관한 것, 표현이 어색한 것 등등 실시간으로 첨삭해 주셨다.


You are very good!


 James 할아버지의 한 마디에 얼었던 몸이 녹고 입꼬리가 덩실 올라갔다. 그제야 읽어보시며 한 번씩 소소하게 터지셨던 순간도 떠올랐다, 예를 들어 Kitchen hand용 Resume에 'I had washed hundreds of dishes at thre restaurant in the barracks' 같은 것에 터져주셨다. 조금씩 조금씩 수정을 거듭한 뒤에 드디어 채용 공고에 하나 둘 지원서를 제출하기 시작했다.

 나의 호주 첫 룸메이트이자 처음의 애환을 함께 하신 James 할아버지. 이번 New  Year Eve firsworks는 오페라하우스에서 본다며 예약해 둔 숙소로 내일 떠난다고 하셨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신기한 것 같다.

유일한 James 할아버지의 사진이라 재탕하게 되는 사진. 할아버지의 백패커 마지막 날 작별 기념사진.

 

 고마운 영준이, 크리스마스이브에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며 연락을 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서 헤어졌고, 곧장 숙소로 향하려다가 센티한 기분을 달래려 밤의 달링하버를 잠깐 들렀다가 백패커로 향했다. 여태껏 2층 침대를 썼는데 마침 1층 침대가 비어서 백패커 탈출은 못했지만 새로운 보금자리인 1층 침대로 안착했다.

Two guys with 크리스마스이브 Dinner in Italian restaurant in Sydney.
사진으로는 다 담지 못했던 화려한 빛이 가득했던 밤의 Darling Harbour.


 일층 침대에 앉아 노트북을 켜자, 꿈만 같던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는 온데간데없이 금세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해변도, 맛있는 파스타와 피자도 더는 없었다. 인터넷으로 이력서를 낸 곳 중 떨어졌다는 답장조차 없는 곳이 허다했다. 집은 찾고 또 찾아도 딱히 마음에 드는 곳이 보이지 않았다. 일도 못 구하고 집도 못 구하면 남은 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밖에 없다는 생각까지 이르렀다. 해야 할 것을 미루고 놀러 다닌 죄가 이것인가 싶기도 하고,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가 할 일을 누군가 대신해 줄리는 없고 다시금 깊은숨을 들이켜고 숙소와 일자리를 찾기 위해 다시금 노트북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one message was left'

 그러는 동안 전화가 온지도 몰랐는데 모르는 번호로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늦게나마 눈치챈 건 통화음은 무음이라 몰랐는데, 추가로 부재중을 알리는 메시지가 보여서 확인할 수 있었다. 번호의 주인공은 알고 보니 로즈빌에 인스펙션 갔을 때 마중 나왔던 남편분이었다. 그러는 찰나 새로이 메시지가 도착했다.



너무도 감사했던 그 메시지. 조금 걱정되기는 했지만 외국에서도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헉...'


 너무나도 감사한 메시지였다. 내가 답장에 쓴 것처럼 생면부지인 나를 초대해 주다니…, 그것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게 방 인스펙션으로 만난 사람에게 이렇게 손을 내밀어주다니…, 좀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곧 통화를 하게 됐는데,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자기 부부도 워홀로 왔다가 학교를 다니고 있다며 나이대도 비슷해 보이고 고생하고 있는 내 모습에 자신들의 옛날 생각이 나서 초대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감사한 마음이 어마어마하게 컸지만 사실 걱정되기도 했다. 내가 종교를 가지지 않았던 부분도 있었고, 혹시나 이상한 교단에 붙잡혀 가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래도 가봐야겠다 결심하게 된 건 한여름의 크리스마스이브 해변도 그렇고, James 할아버지의 이력서 교정, 이브 저녁 맛난 파스타도 그렇고, 이 모든 게 겪어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먼저 판단할 수 없다는데 스스로 동의하게 되어서 그랬다. 사실 크리스마스고 뭐고 간에 또 백패커 방 안에서 노트북만 두드리고 있어야 하나 싶었는데, 크리스마스 파티라니... 노트북 덮개를 곧장 덮어버렸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그럼에도 떨고 있는 나 자신에게는 걱정에서 한 표를 깎아서 설렘에게 한 표 더 건네주며 좋은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걱정과 고민거리는 잠시 뒤로 젖혀두고서 내일 있을 파티에 대한 기대를 품고서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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