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28.
호주 출국 전전날밤, 혹시나 빠뜨린 게 없는지 하고서 그렇게 낑낑대며 쌌던 짐을 풀고 다시 싸기를 반복했다. 출국 당일, 지하철에서 가방을 잃어버렸을 때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시드니에서 떠날 이날만큼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좀 너무 많이 쌌나?'
상경, 출국, 백패커행, 그리고 지금.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추리고 추린 게 그 정도였지만 총 네 번의 짐꾼 노릇을 하고 있자니 갑자기 탄식이 절로 나왔다. 날씨는 덥지, 남들 의식 안 하는 호주라고는 하나, 짐 덩치가 있어서 남들 부딪힐까 걱정되어 조심할 때도 그렇고, 계단을 이동할 때, 개찰구를 지날 때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여행할 때 짐은 간단히'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Train을 타기 전에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는데, 갑자기 Opal Card(시드니 교통카드) 잔액 부족이 떠오른 것이다. 공항철도가 $18 정도 했었는데 마지막으로 카드를 썼을 때 잔액이 한 자리였던 게 생각이 났다. 그냥 갈까도 생각했지만 혹시라도 이것 안 내서 오점을 남길 바엔 확실히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공항철도 배차시간은 아직 여유가 있는 편, 주변에 충전 키오스크(Kiosk)를 찾아봤다. 사람이 적은 쪽에 서서 기다리는데 좀처럼 사람이 줄지 않는 것이 아닌가? 대충 고개를 꺼내서 살펴보니 고장 난 줄에 서있던 것이다. 다들 캐리어 하나씩은 앞에 세워둔 여행객들 같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급하게 옆에 긴 줄로 줄을 바꿔 섰다. 줄을 바꿔 서느라 시간을 잡아먹긴 했지만 어쨌든 오팔카드 충전을 완수할 수 있었다. 사람이 참 간사한 게 그 순간 아까의 백패커 프런트 직원이 떠올랐다. 딱히 고마울 정도는 아니지만 그 Shake it 때문에 조금 더 일찍 나서게 됐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날 진짜 메인이벤트는 따로 있었다.
작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공항에 도착했다. 도착하고 나니 그동안의 피로는 잊은 채 왠지 모르게 으쓱하고 신난 기분이 들었다. 가장 큰 이유는 처음으로 International Airport가 아니라 Domestic Airport을 가보게 된 것이 그랬고, '국내의, 국내선'을 뜻하는 Domestic이란 단어가 호주고 영어고 벌벌 떨던 내가 뭔가 진짜 호주 내국인(?)이 된 기분이 들어서 살짝 신이 났다. 그리고 내 기대와는 달리 곧장 현실을 마주했다.
순간 익숙한 장면이 떠올랐다. 설, 추석 때 귀경길 버스터미널의 그 모습. 호주에 와서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은 처음 봤다. 아 그래도 난 예매했지 하고 살펴보니 모두 Check-in 줄이었다.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오고 한번 더 백패커 프런트 직원이 떠올랐다. 아, 이것이 전화위복, 새옹지마라 하던가?
그랬다. 호주에서는 Christmas 시즌부터 New Year 시즌까지가 우리나라 연휴랑 비슷한 것이었다. 누군가 이 시즌에는 웬만한 관공서나 은행 일 보기는 힘들 거란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다. 다시 생각해 보니 크리스마스 연휴(Eve-Christmas-Boxing day-Public holiday)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인파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수화물 무게도 쟀다가 잰걸음으로 수십 분을 줄을 좇고 나서야 수화물도 부치고 수속을 받을 수 있었다.
비행기를 타기 전에도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검색대의 남자가 "한국! Okay! 안녕!'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유인즉슨 비행기를 몇 번 타보지 않은 나는 습관처럼 검색대 앞에서 여권에다가 표를 꽂아서 보여준 것이다. 그러자 검색대의 남자가 "No need"거리길래, "Pardon?" 했더니 "한국! Okay, 안녕!" 했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우리나라에서 시외버스터미널 이용할 때 여권 검사는 안 했던 거 같기도 하고.. 뭐 그렇겠지? 그나저나 '안녕'이라니, '안녕하세요'를 가르쳐줄 걸 그랬다.
보딩(Boarding)을 앞두고 나니 시드니는 진짜 안녕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의 호주 첫 도시, 조금 더 멋진 일만 가득하길 바랐는데, 막상 떠나려고 하니 꽁무니를 빼는 모양새가 스스로도 좀 민망함이 들었다. 매번 드는 '뭐라도 더 해볼 걸 그랬나?' 같은 생각이 맴돌았지만, 이 마당에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도 뒤따랐다. 한 번씩 '여기서도 못했는데 브리즈번 간다고 제대로 할 수 있을까?'같은 자기부정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아찔하기도 하고 '그럼 뭐 어쩌라고?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일기에 남겨둔 '아쉬움조차 남지 않는다면, 나는 무엇으로 이곳을 그리워하나?'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피식하고 웃음이 지어지더니 지나간 것 중에 가질 것과 남길 것을 나눠 보고 나니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푸른 하늘과 분홍빛 구름을 지나고 나서 노을과 전역 하늘을 지나고 나니 곧 브리즈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찰 때문에 출발시간과 도착시간이 같았지만 날은 훨씬 더 어둑어둑해진 느낌을 받았다. 하기사 Local time이라고는 하나 한 시간 반 이상 날아서 온 곳이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결 조용한 공항, 수화물을 찾는 것도 금방 찾았다. 그런데 짐을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닌 하루라 그런 것일까? 유난히 더 피곤하고 힘이 든단 생각이 들었다. 곧장 픽업을 잡은 곳에 전화를 해서 얼른 숙소에 도착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