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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무 Oct 19. 2019

우리 좀 걸을까요

집에 가기 아쉬울 때 우리가 하는 말



걷는 것을 좋아한다. 내 속도로 팔다리를 움직일 때 힘이 차오르는 느낌과, 거리의 소리가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들려올 때 점차 고요해지는 기분이 좋다. 해가 지기 직전 걷기 시작해 하늘의 색이 바뀌는 장면을 보고, 어둠 속에서 그 날의 산책을 마치는 것을 가장 선호하기는 하나, 아침엔 아침의 풋내 때문에, 낮에는 낮의 햇볕 때문에, 밤에는 밤의 공기 때문에 좋으니 그냥 걷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이유 없이 걸을 때는 동행을 두지 않는 편이다. 걸음이 유독 빠른 탓에 누군가와 함께 걸을 때는 보폭에 신경이 쓰이기도 하고, 혼자 있을 때의 적요를 온전히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신 차려보면 만 보가 훌쩍 넘곤 해 그쯤 되면 상대방에게 미안해진다.


그럼에도 같이 있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 우리 좀 걸을까요?


이 발화는 보통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발생한다. 식사를 마치고, 혹은 그 후 술이나 차까지 마시고 나와서 자연스럽게 지하철역 쪽으로 향하고 있을 때, 그런데 두 사람 모두 노선도를 찾아본다거나 귀가 시간을 계산한다거나 하지 않고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사람들마냥 느릿느릿 걷고 있을 때, 어디 다른 가게에 들르기엔 애매하지 않을까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렇게 묻고 나면 보통은 네 그래요 정도의 대답이 돌아오고, 다음 장면에서는 두 사람이 밤의 거리를 걷고 있다. 단 한 번도 나의 뒷모습을 본 적 없고- 유체이탈이라도 경험하지 않는 이상 아마도 영영 그럴 테지만, 왠지 밤공기를 헤치며 걷는 나와 상대방의 뒷모습은 굉장히 생생하게 그려진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걷는 길엔 할 이야기가 많다. 지도를 보며 걸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며 걸음이 빨라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눈앞에 누가 가져다 놓은 것처럼 대화거리들이 흩어져 있고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곤 했던 가게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풍겨온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면 된다. 

리 다음엔 저기 가볼까요? 비록 그런 약속이 기약 없이 쌓여만 간다 해도, 그 순간의 불빛과 온기는 어디 가지 않는다. 종로의 골목이나 경의선 책거리나 이태원의 오르막을 지날 때 어느 틈바구니에서 먼지 뒤집어쓴 기억을 꺼낼 때, 살금 웃지 않는지.


소개글을 걸어둬야 할 때가 있으면 이 문장을 자주 쓴다. 밝은 쪽으로 걷는 사람. 긍정을 지나치게 긍정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일이라고 한다만, 저것보다 나를 잘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은 없으니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둘이 걷는 밤이면 꼭 빛 잘 드는 편으로 향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충분히 괜찮을 것 같았다.




어느 계절이 지나가는 시기엔 해 질 때마다 하늘에 핑크빛이 번졌다. 푸른빛도 붉은빛도 보랏빛도 잿빛도 한 차례씩 비쳤다 사라지고, 그렇게 색이 계속해서 바뀌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멈춰 서서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어둠은 그 장면을 통과하여 온다.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목마다 그 풍경이 반복되었고 그러므로 둘이 걷는 어둠은 무채(無彩)가 아니었다. 그 안에 온갖 색이 다 있었다. 검은 크레파스를 긁어내면 알록달록 색이 드러나는 그림처럼, 어떤 밤은 그런 이야기들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새벽 내내 걸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아쉬워도 우리는 집에 가야 한다. 집에 가지 않고 버틴다 한들 어둠은 또다시 걷히고 희뿌연 하늘이 밝아올 테다. 그것은 또 그대로 아름답지만 어둠에 감추었던 이야기들은 밤과 함께 사라지겠지. 그것은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다.


산책 중 발길을 멈추게 했던 가게들을 낮에 지난 적이 있었다. 불 꺼진 꼬치구이집이나 선술집, 칵테일바. 한밤중의 따뜻하고 맛있는 냄새는 풍겨오지 않았다. 이 거리 정말 외국 같네요, 그렇게 말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서울스러웠다. 어둠이 찾아오고 간판에 노란 불빛이 들어오면 다시 그 풍경으로 돌아갈까. 궁금하지만 그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거리를 찾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 우리 좀 걸을까요?


이 물음표 안에는 (이대로 집에 가긴 아쉽지 않나요)라는 말이 숨어 있다. 나도 알고 당신도 알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이유가 있을 거다. 아쉬워하는 마음은 참 예쁘지만, 가만가만 참 사랑스럽지만, 그처럼 무르기 쉬운 것도 없다. 그 감정은 우리의 걸음을 붙들 힘이 전혀 없었던 모양이다. 아쉬움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느려진대도, 그건 그 밤의 이야기일 뿐이다.



어젯밤엔 괜히 집에 들어가기 싫어 퇴근 후 슬렁슬렁 걸었다. 누군가 전화를 걸어주지 않을까 기다렸던 것도 같다. 연락을 간절히 기다리는 금요일이면 누군가 저녁을 먹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던 기억이 남아있어 그랬을까. 그렇지만 영양가 없는 알림이 몇 차례 울렸을 뿐, 반가운 소식은 없었다. 나의 아쉬움은 여기까지, 오늘 만나서 걷지 않겠느냐고 물을 용기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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