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기] 04호 (2024.08.14)
* [시인이기]는 차재신, 연정모 두 시인의 메일링 서비스입니다.
* 브런치에는 비정기 아카이빙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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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시인이기]의 연정모입니다. 짧은 연휴를 앞두고 인사말을 씁니다.
목요일은 광복절! 그래서 금요일에 휴가를 냈습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징검다리 휴일을 놓칠 수 없었어요. 나흘간 집에서 푹 쉬면서 창밖 구름이나 보고, 시 생각만 내내 하고 싶어요. 여름방학 냄새 나는 이 시기, 무엇을 하며 보내고 계신가요?
오늘 보내는 글들은 어쩌다 보니 좀 진지해졌어요. 시 쓰기에 대해서라면 우리가 무슨 얘기를 쓸 수 있을까? 고민했기 때문인가 봐요.
내내 글이 써지지 않아 고생하다가 지난 일요일에 재신을 만났습니다. 집중이 적당히 잘 되는 카페에 앉아 오전부터 글을 썼어요. 우리는 꽤 좋은 작업 파트너여서 서로를 방해하는 일이 드문데요. 이번엔 '시 쓰기'에 대해 쓰는 중이라 그랬는지 말하고 싶다…는 눈으로 상대방을 흘끔 보는 순간들이 있었어요.
재신은 다음 시집을 어떤 형태로 구상하고 있는지 들려줬고요. 저 역시 '첫 시집은 이런 구조면 어떨까' 품고 있던 생각을 나누었어요. 어렴풋한 스케치일 뿐이었는데 말로 꺼내 놓으니 조금씩 형체를 가지게 되더라고요. 재신도 같은 걸 느꼈는지 "역시 말로 구체화해야 하나 봐" 하더군요! 흐흐.
그러면서 원고를 썼습니다. 즐거운 작업이었어요. 쓰는 건 언제나 쉽지 않지만, 쓰고 나면 이만한 기쁨이 또 없죠. 점심도 거르고 원고를 완성한 저와 재신! 낮부터 여는 호프집에 식사를 하러 갔는데요. 음식이 나오기 전 생맥주를 꿀꺽꿀꺽 마시며 서로의 글을 읽는 순간이 너무도 상쾌했습니다. 또렷하게 행복했고요.
우린 전혀 다른 사람이고 전혀 다른 글을 쓰는데 비슷한 말을 하고 있을 때가 있어요. 이번에도 그랬는데요. 결국 "시 쓰기는 재밌어"라는 얘기를 썼지 뭐예요. 뜨거운 낮에 맥주를 마시니 금세 불콰해졌는데, 이런 작은 흥성거림 속에서 "시 쓰는 거 재밌어!" 얘기할 수 있다니. 또렷하게 행복했어요.
여기, 행복하게 쓴 두 편의 글을 보내드립니다. 구독자님의 쓰기는 저희와는 또 다른 형태겠지요. 저희가 모르는 구독자님만의 고유한 기쁨일 거고요. 그것이 어떤 색으로 빛나고 있을지가 몹시 궁금해요. 우리 언젠가 모여서 <나의 기쁨 자랑하기> 대회라도 열면 얼마나 또 좋을까요.
차재신
이제 시를 쓰는 과정이 담긴 원고를 써야 한다. 시를 쓰는 과정을 담으려면 시를 쓰려고 시도해야 한다. 지금 떠오르는 문장을 써 보자. '죽은 토끼를 물속에서 건졌다' '토끼는 평온해 보인다' '방금 물에서 태어난 것처럼' 행을 나누면 이렇게 된다.
물속에서 죽은 토끼를 건졌다
토끼는 평온해 보인다
방금 물에서 태어난 것처럼
첫 문장만 봤을 때는 아직 시가 어디로 갈지 모른다. 장면만 있다. 서경이 될지, 심상이 될지, 서사가 될지 모른다.
두 번째 문장은 설명에 가깝다. 여기서 토끼를 응시하는 화자의 시선이 드러난다.
세 번째 문장은 보다 묘사적이다. 화자는 죽은 토끼의 모습을 '방금 물에서 태어난 것처럼' 느낀다. 여기서 화자의 감정이 묻는다.
여기까지 쓰고 내게 생기는 질문. 왜 죽은 토끼지? 왜 하필 물속이지? 왜 죽은 것을 방금 태어난 것처럼 묘사하지? 왜 나(화자가 아닌)는 토끼를 죽였지?
나는 토끼를 모른다. 괜히 죄 없는 토끼를 꺼내서 보여 주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른다. 지금 이 상황이 (시적) 현실인지 상상인지, 아니면 어떤 이야기 속인지도 모른다.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시 이어지는 질문.
나에게 토끼란 무엇인가. 이미지들이 뒤따라 태어나지만 나는 그 앞의 기로에서 멈춘다. 토끼를 해체(의미적으로)할지, 토끼를 토끼인 채로 내버려둘지.
토끼를 가르자 백야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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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를 내버려두면서 해체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토끼가 무엇인지 정해지지 않았기에 온전하지 않은 길이다. 나와 토끼의 간극이 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비약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비약이란 의미의 '규정'보다, 의미의 '확장'에 가깝다. 무엇에 대해 쓴다는 것은 그 무엇을 규정함과 동시에 확장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안정하고, 그래서 어렵고, 그래서 재밌다.
시를 쓰는 일은 불안정한 길을 계속 걸어가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토끼는 어떻게 됐나요?" 나도 모른다. 토끼는 갖다 버릴 수도 있다. 나랑 아무 관련도 없는 토끼다. 그냥, 이런 문장 정도는 건진 것 같다. '모든 국경은 백야와 같다.'
이렇게 쓰고서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을 수도 있다. 예전에 이광호 선생님은, 비평이란 '내가 최선을 다해 실패하는 과정을 잘 봐'로 요약했었다. 시 쓰기란 뭘까? 바꿔 말하면 '내가 최선을 다해 실패한 결과를 잘 봐' 정도가 될까.
연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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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는 건 왜 재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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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소스⟫라는 시집을 아십니까? 임정민 시인의 시집이고, 5월 말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시집은 두 가지 지점에서 독특한데 (1)무려 42페이지에 달하는 시가 수록되어 있고 (2)오픈 소스에서 착안한 ‘펜 소스'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사실 시집을 읽는 순간에 위와 같은 요인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내가 무척 들뜬 마음으로 문장들을 반복해서 읽었다는 것이 중요하고, 산만하게 꽥꽥거리며 시를 쓰고 싶어졌는 것이 더더욱 중요하다. 필요한 것을 발견했을 때 붕 뜨는 기분, 그런 순간이 있었다.
7월 마지막 날에는 ⟪펜 소스⟫ 낭독회에 갔다. 말도 안 되게 뜨거운 빛이 내리꽂힌 날이었다. 행사는 다행히 저녁 시간이었지만 낮 동안 발열하는 것들을 너무 많이 보았더니 눈이 찢어질 것처럼 피로했다. 시집의 다홍색 표지 때문일지 낮의 잔열 때문일지, 미약한 흥분 상태로 행사장에 앉아 있었다. 통창을 통해 은행나무의 무성함이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
다른 사람의 쓰기를 듣는 일은 얼마나 재미있나. 임정민 시인은 정확한 언어로 주어진 질문에 답변했다. 시집을 구상하게 된 경위, 시들을 파트로 나누고 배치한 기준, 시에 등장하는 소재와 행위에 대한 호오(또는 무관심)를 들려주었다. 사고 영역을 풀가동하며 창작하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무척 놀랍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음껏 가져다 쓰세요.”라는 말이었다. 위에서 말한 ‘펜 소스’ 정신인데, 멋지고 정확하게 설명해야 할 것 같아 보도자료를 빌려 온다. (임정민 시인도 편집자님께 샤라웃을 보낸 것을 보니 그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된 모양이다)
‘펜 소스’는 ‘오픈 소스’라는 용어에서 착안한 개념이다. 오픈 소스는 소스 코드를 일반에게 공개하여 사용자들이 자유로운 접근을 통해 수정 및 배포를 할 수 있도록 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일컫는다. 임정민 시인은 시집 자서에 이렇게 썼다. “open source -> pen source”. 시를 하나의 프로그램이라고 상정한다면, 우리는 펜 소스를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펜 소스는 사용자(독자)들이 자유로운 접근을 통해 자신의 목적에 맞게 수정 및 배포가 가능하도록 한 프로그램(시)를 일컫는 말이라고. 언어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재료이므로 독자들은 자신이 가진 재료를 재배치하고 자르고 새로 붙여 한 편의 시를 완성할 수 있다. 시집이라는 매체에서 펜 소스라는 개념 아래 코드의 기본적인 작동 방식을 정의하고, 한 편의 시를 완성할 수 있으려면 임정민에게 주어진 과제는 크게 두 가지다. 펜 소스를 정의하는 시 쓰기. 펜 소스를 통해 완성된 미학적인 시 쓰기. 임정민은 층위가 다른 두 가지 과제를 또 다른 개념이자 인물을 시 안에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동시에 성취해 낸다.
낭독회를 마무리하며, 시인은 한 번 더 이야기했다. 수없이 많은 텍스트와 영상과 음악과 장면이 나의 시를 만든 것처럼, 내 시도 다른 무엇의 소스가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고.
헉!
그로부터 며칠 전으로 돌아가 보자. ⟪펜 소스⟫를 읽으며 드릉드릉 시 쓰고 싶어진 어느 저녁을. 디카페인 카페라떼와 에그 타르트를 먹은 직후고, 좋아하는 음식을 섭취했기 때문에 흥분할 에너지도 충분하다. 그의 시를 읽으며 게임 세계관 속을 어리둥절 그러나 기쁘게 헤매는 기분이었는데. 살짝 취한 것처럼 마구마구 글을 쓰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파일을 세 개쯤 켜 놓고 이걸 쓰다 저걸 쓰다 했다. 하고 싶은 말들을 우루룩 써내려가다가 이 묘사와 저 묘사를 더했다.
그렇게 쓴 시를 뜯어 볼까.
① 제목은 ‘엘렉트라, 열 살’. <데드풀과 울버린>을 보고 나와서 ‘엘렉트라’가 제목인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엘렉트라는 쌍차라는 무기(이런 이름인 줄은 검색해 보고 알았다. 영어로는 일본어 명칭인 Sai라고 표기한다.)를 사용하는 여성 암살자다. 슈퍼파워도 초능력도 없고, 무려 그냥 인간이다. 다만 빠르고 강하다. 이 분이 시에 등장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이름을 사용하고 싶었다. 영화에서 큰 역할을 하는 캐릭터가 아닌데도 그랬다.
② 여름 캠프장이 배경이다. ⟪펜 소스⟫ 읽다 ‘야영장’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눈에 들어와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에서 크게 중요한 소재는 아니었는데도 왠지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조금 재밌던 점: 다 쓴 후 친구 J에게 보여 주니 “9월에 우리 캠핑 가기로 해서 쓴 거니?”라고 물어 왔다.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무의식 중 캠핑 계획이 있었는지도.
③ ‘레서피’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레시피가 아니라 레서피라고 쓴 이유는, 친구 Y가 시를 낭독할 때 ‘레서피’라고 발음했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원 발음과 가까워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니고 그저 듣기에 좋았다. 벌써 몇 해 전 장면이다.
④ 어금니가 흔들린다는 묘사가 나오는데 이 시를 쓸 때 실제로 이가 흔들렸다. (치아 교정 중이다.) 혀로 밀었을 때 약간의 움직임이 느껴지기에 손가락을 넣어봤는데, 진짜 흔들렸다.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 다행히 원래 그렇다고 함.
시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는 이것 말고도 훨씬 많을 것이다.
어찌 보면 시 쓰기는 일종의 패치워크 작업일 수도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지금의 내게 또렷하고 중요한 것들을 꿰어, 세상에 존재하길 바라는 방식으로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 내가 느낀 것은 자유였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들을 원하는 만큼만 발설할 수 있다. 원할 때 이야기를 중단할 수 있다. 나는 내 기억의 첫 순간부터 언제나 글 쓰는 사람이고자 했는데, 그 오랜 열망은 어느 순간부터 열패감과 엮여 곱지 못한 행색으로 나를 따라다녔다. 내가 만든 이야기와 문장은 어디에 가지고 가도 형편없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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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는 것(혹은 쓰고 싶다는 것)은 비밀스런 자랑이자 공개된 부끄러움이었으며
계속 이런 마음을 데리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너절한 공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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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를 쓴 후로는 고요히 자유로워졌다.
합평장에서 누가 내 시를 박하게 평가해도 부끄럽거나 절망적이지 않았다.
쓰는 동안의 커다란 기쁨과 깨끗한 슬픔, 그런 이상한 충분감이 나를 지켜 줬다.
왜였을까,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 보자면, 시만큼은 완결된 무엇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각각의 편편이 작은 세계가 되어 나를 채워 준다고.
그러니까 ‘리얼 월드’에서 물어온 것들로 내가 이룩한 왕국. 연약하고 조악할지라도 좋아하는 맛으로만 가득한.
“시는 가장 내밀하고 개인적인 장르이기 때문에, 오히려 모두에게 유효하다.” 그날 임정민 시인이 한 말이다.
나 역시 누군가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 낸 패치워크에 감격한다. 그 세계는 그것대로 온전히 아름다운 동시에 나에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다. 의도와는 다른 질감으로 인식될 수도 있고, 단어의 일부만 뚝 남아 엉뚱한 감상을 남길 수도 있다. 그리고 그중 무엇은 나의 재료가 되어 또 다른 패치워크의 한 조각이 될 수도 있다.
수없이 많은 문장과 소리, 색채와 질감이 한순간에 뒤섞여, 어느 순간의 나에게서 시가 발생한다. 또다시 ⟪펜 소스⟫의 보도자료를 빌려오자면 ‘자신이 가진 재료를 재배치하고 자르고 새로 붙여 한 편의 시를 완성할 수 있다.’
*
시 쓰는 건 왜 재밌을까? 놀이니까 그렇겠지.
위에 쓴 시와 동시에 쓴 게 하나 더 있다. 제목은 ‘물고기 언덕’. 재신에게 보여줬는데 자긴 잘 모르겠다고 했다. 내 시를 꽤 재밌어해 주는 독자에게서 이런 박한 평이라면, 진짜 영 아닌 거다. 그래도 크게 속상하지 않았다. 엉망인 시는 엉망인 대로 맘에 든다. 누구한테 보여주진 못하겠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나를 구성한다.
영영 첫 시집을 내지 못하더라도, 너그러운 친구 한둘만이 독자로 남을지라도 아마 나는 시를 쓸 게 분명하다. 재밌으니까. 세계를 알알이 뜯어내고 재편집하고 원하는 것으로 채우는 것이 내게는 가장 큰 오락이니까.
�생활기
차재신: 술을 정말 많이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연정모: 오 이렇게 바쁠 수가… 주간입니다. 어째 계속 바쁘다는 얘기만 쓰는 기분이지만,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어찌할 수가 없네요. 그런데 저, 얼마 전 재미로(이런 단서를 꼭 달아 줘야 해요) 보러 간 사주에서 '8월 8일부터는 일도 전부 괜찮아진다'는 이야길 들었어요. (만세!) 좀 있으면 조금은 여유로워지지 않을까 기대하는 중입니다. '일이 잘 되어서 더 바빠진다!'는 의미는 아니길 바라 볼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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