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는 '양관식'이 아닌 '반관식'이 산다

by 리치그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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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회사 동료들과 회식을 하던 날이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언니의 휴대폰에 '박 씨'라는 이름으로 전화가 걸려왔고, 통화가 끝난 뒤 다들 누구냐고 묻자 언니는 태연하게 “남편”이라고 말했다. 그 순간 테이블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 이야기를 시작으로 우리는 배우자를 휴대폰에 뭐라고 저장해놨는지 공개하며 한참을 까르르대며 웃었다.


누군가는 ‘박 씨’, 누군가는 그냥 ‘남편 이름’, 누군가는 ‘남의 편’, 누군가는 ‘☆☆ 아빠’, 누군가는 '재수탱이'. 각자의 관계와 성격이 작은 이름 하나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나도 자연스럽게 털어놓았다. 내 휴대폰 속 남편의 이름은 오래전부터 ‘김기사♥’라고.

언제부턴가 운전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가 어디를 가든, 어디에 있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데려다주고 데리러 오는 남편의 모습이 너무 익숙해져 그렇게 저장해두었다.

며칠 전 위내시경을 수면으로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흘리듯 건넸는데, 남편은 회사에 휴가까지 내고 병원으로 나를 태워다 주었다. 검사 내내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또 무사히 깨어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날짜도 정확히 기억한 듯 오늘 저녁 퇴근길 외투 안쪽에 빼빼로를 하나 숨기고 들어와 “짠!” 하고 내민다.

“나같이 스윗한 남편이 어디 있어?” 그 말 끝에 꼭 생색을 덧붙이는 것도 빠지지 않는다.

저녁을 먹고 귤이 먹고 싶다고 했더니 혼자 조용히 나가 마트에서 귤 한 팩을 사 오고, 며칠 전 딸이 고구마 맛탕이 먹고 싶다고 한 이야기를 기억했다가 고구마와 물엿까지 사 오는 사람이다. 세상 다정하고 따뜻한 성품의 사람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다정함에 늘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게 있다. 남편 본인은 인정하지 않지만 남편은 잔소리 대마왕이다.

해줄 거 다 해주면서도 100%의 칭찬을 못 받는 이유는, 다정함 사이사이에 섞여드는 잔소리 때문이다.

요즘 들어 여성 호르몬이 나오는지 잔소리가 더 심해져 때로는 얄밉고, 때로는 뜬금없이 짠하다.


작년 겨울,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에 푹 빠져 몇 번을 보고 또 봤다.

애순이에겐 세상 다정하고 순정적인 남편 양관식, 자녀들에게는 바보같이 헌신적인 아빠 양관식.

그 모습을 보며 얼마나 울컥울컥했는지. 어릴 적 우리 아빠의 모습과 내 남편의 모습이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잔소리 때문에 양관식이 아닌 ‘반관식’이 되어버렸다.

다정함은 그대로인데, 잔소리가 반을 잡아먹어서.


그래도 문득 생각한다.

잔소리가 내 귀를 피곤하게 할 때도 많지만, 그 잔소리 속에는 걱정이 있고 사랑이 있고 책임이 있다.

해줄 거 다 해주는 사람이니까 잔소리도 그만큼 따라오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나는 조금씩 그 모순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도 내 휴대폰 속 남편의 이름은 여전히 ‘김기사♥’로 남아 있다.

남편이 언제가 내 휴대폰에 저장된 자신의 이름을 보며 서운해하길래 "그래도 내가 꽉 채운 하트 넣어줬잖아." 라고 했더니 피식 웃는 남편.


잔소리와 다정함이 함께 실린 그 이름이 오늘도 나의 일상을 안전하게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있다.



성공보다 성장을 추구하는 @리치그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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