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 아들이 살고 있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지냈다. 샌프란시스코에는 중국인들이 많이 산다. 내가 묵었던 밀브레 동네에는 한자 간판을 단 중국식당이 즐비하다. 미국인지 중국인지 헷갈릴 정도로 많은데 제대로 된 본토의 중국 음식, 특히 광동 음식을 즐기기에는 이만한 동네가 없다.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가 음식이 아닌가 싶다.
하루는 아들이 아프가니스탄 음식을 먹어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예전에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파키스탄 식당을 간 적이 있었다. 텐트를 치고 바닥에는 카펫을 깔아 놓아 마치 파키스탄에 온 듯한 분위기가 나는 전통 식당이었다. 아프간 식당이라면 그런 비슷한 곳이겠거니 하며 아들을 따라갔다. Kabul Afghan Cuisine이라고 커다랗게 쓰인 식당 입구에는 한 중년 남성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넓은 내부에 하얀 리넨 테이블보가 덥힌 각 테이블은 평일의 이른 저녁시간임에도 거의 차 있었다. 입구의 벽 한 면을 차지한 전통의상과 식당 안에 걸린 스티브 맥커리의 아프간 소녀 사진이 식당의 정체성을 드러냈지만 절제된 인테리어는 품위가 있었다. 나는 예상과 다른 실내 모습에 흥분하여 감탄사를 연발했다. 식당이 우아해서 놀랐다는 둥, 세련됐다는 둥, 그러다 결정적인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그런데 이 나라, 탈레반 나라 아냐?!” 아들이 기겁을 하며 나를 나무랐다. “그런 말을 대놓고 하면 어떡해요” 아차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옆 테이블과 떨어져 있어 다른 손님들이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꾸지람은 계속됐다. “다른 나라 사람이 엄마 옆에서 한국 욕을 하면 엄마 기분이 어떻겠어요.” 아들의 지적은 너무나 타당하여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이 나라를 무시하려거나 없는 사실을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깃털처럼 가벼운 나의 입에 대해서는 반성했다. 한편으론 아들의 속 깊음과 성숙함이 대견했다. 아프간 요리는 인도 음식이랑 닮아보였다 메뉴에는 사모사와 커리 같은 요리도 있었다. 어느 메뉴든 넓적한 아프간 빵이 곁들여 나왔다. 와인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기분으로 한잔씩 시켰다. 커다란 투명 유리병에 가득 찬 붉은 와인이 빈 와인 잔과 함께 나왔는데 와인 한 병 시킨 것보다 양이 많아 반 이상을 남겨야 했다.
칼리드 호세이니가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쓴 [연을 날리는 아이들]이란 소설이 생각났다. 새삼 칼리드라는 작가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이듬해 칼리드 가족은 캘리포니아로 망명을 했다. 당시 15살의 작가는 영어를 전혀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대에 들어가 의사가 됐을 뿐만이 아니라 영어로 소설을 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Kabul Afghan Cuisine을 통해 아프간의 역사를 엿보게 되었고 많은 아프간인들이 탈레반 독재정권을 피해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감을 알게 되었다. 음식이란 배고픈 한 끼를 때우거나 미각을 만족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정체성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산을 하며 직원에게 식당 입구의 사진이 누군인지 물었다. 식당의 원주인이란 답이 돌아왔다. 지금은 친척이 물려받아하고 있다고 했다.
샌프란시스코 시에서 베이브리지를 건너면 UC 버클리 대학이 있는 버클리 도시를 만난다. 버클리 대학 주변, 그중에서 유니버시티 애비뉴에는 히말라야, 마루가메 우동,카페 에뜨왈, 방콕 타이,루카 쿠치나 이탈리아나, 매드 서울, 터키쉬 키친 등 이름만으로 어느 나라 음식인지 짐작이 가는 음식점이 줄지어 있다. 마치 음식 박람회장을 방불케 한다. 전 세계에서 온 버클리 대학생들은 학교 캠퍼스에서는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 학교 밖에서는 이국 음식을 먹으며 몇 년간을 버클리에서 생활한다. 타인의 삶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지구인으로 성장하는 데 음식만 한 교육이 없는 것 같다. 이십 대 초반의 젊은이들은 낯선 음식을 맛보며 새로운 문화를 접할 것이다. 포크와 나이프로,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손으로 밥이나 빵을 먹는 행위를 통해 세상의 다양함을 경험할 것이다. 여러 가지 형태로 조리된 채소나 고기가 여러 재질의 그릇에 담겨 테이블에 놓여지는 것을 보며 세상에 정답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음식을 통하여 그들의 시야와 사고는 넓어지고 깊어질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나는 결혼 전에 가지나물은 집간장으로만 버무리는 줄 알았는데 시어머니는 고추장과 식초로 맛을 내었다. 이태리에서 올리브오일이 뿌려진 차가운 가지요리를 처음 보았고, 일본에서는 가지가 들어간 카레를 맛있게 먹었다. Kabul Afghan Cuisine에서 남편은 가지가 들어간 소고기 요리를 주문했는데 그 깊은 맛에 감동했다.
버클리 대학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솔라노 거리에는 Nomad라는 티베트 식당이 있다. 지난여름 들렀던 곳인데 이번에 아들과 다시 갔다. 식당은 한참 점심시간인데 한산했다. 티베트인으로 보이는 한 커플이 유일한 손님이었다. 주문을 기다리는데 테이블의 남자가 티베트말로 말을 걸었다. 우리를 티베트인인 줄 알았나 보다. 못 알아듣는 시늉을 하니 영어로 미안하다며 웃었다. 내가 이곳에 사느냐고 물으니 그렇다며 리치먼드에 산다고 했다. 아들 말로는 좋은 동네라 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티베트인과 인연이 있다. 내가 처음 만난 티베트인을 처음 만난 곳은 홍콩이었다. 1995년 홍콩으로 이사 와서 운전면허를 따러 운전면허학원에 등록을 했다. 그곳에서 옆자리의 여성과 눈이 마주쳤는데 서로가 홍콩사람이 아닌 외국인이란 사실에 반가워하면서 통성명을 하다가 그녀가 티베트인임을 알게 됐다. 티베트 망명정부를 후원하며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는 날을 기다린다는 그녀가 생각났다. 티베트 망명정부는 인도의 다람살라에 있다. 십여 년 전 뉴델리에 살 때는 티베트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가 뉴델리에 강연을 하러 왔다. 그 무렵 이미 팔십이 넘은 나이였으나 오렌지 색의 티베트 법복을 입은 달라이라마는 꼿꼿했다. 그가 영어로 전한 메시지는 간결하고 명료했는데도 달라이 라마 옆에는 통역사가 있었다. 그는 본인의 의미전달이 부족하다 싶으면 통역사에게 다시 한번 뜻이 잘 전달 됐는지 확인하며 강연을 이어갔다. Nomad에 들어서자 홍콩에서 스쳤던 티베트 여성과 뉴델리의 강연장에서 본 달라이 라마의 환한 미소가 겹쳐졌다. 식당은 티베트 정취를 풍겼는데 식당 안쪽의 넓은 좌석이 마련된 벽에는 티베트의 파란 하늘과 산이 그려져 있었다. 아들은 데친 케일이 들어간 양고기를, 나는 튀긴 토란 위에 갖은 야채를 볶아 넣은 요리를 먹었다. 식사하는 동안 백인 남녀가 들어와 우리 뒤쪽에 앉았다. 티베트음식이 처음이고 채식을 먹고 싶은데 추천을 해 달라는 소리가 들렸다. 표고버섯과 시금치가 들어간 모모가 괜찮다는 종업원의 답이 이어졌다. 버터밀크로 만든 밀크티는 짠맛이 났는데 소금이 차와 잘 어울림을 처음 알았다. 두 번이나 들려 맛있게 먹은 식당에 손님이 뜸 한 게 마음이 걸려 아들에게 주변에 소문을 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달살이 했던 밀브레 집은 언덕에 있고 공항과 가깝다. 집을 나서면 도로에서 샌프란시스코 공항이 내려다 보인다. 이착륙하는 비행기도 잘 보이고 이착륙 소리도 크게 들린다. 청명한 밤하늘에는 날아가는 비행기가 반짝이는 별 틈에 섞여 별처럼 보였다. 한국에 오기 며칠 전에는 보름달이 떴다. 언덕에서 바라보는 보름달은 크고 둥그랬다. 중국에서 온 이민자 중에서 홍콩인이 가장 먼저 자리 잡았다는 샌프란시스코는 태평양과 접해 있고 그 바다를 건너면 홍콩섬이다. 이들이 공항 근처에 몰려 사는 이유가 조국을 향한 그리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민족과 인종들이 꾸려가는 샌프란시스코의 음식점은 삶의 터전이자 잠시 머물다가는 여행자에게 추억과 이국의 맛을 선사해 주는 공간이다. 그들의 번영을 빈다. (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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