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히로시마 공항은 작고 아담했다. 입국수속을 하는 사람들은 내가 타고 온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이 전부였다. 짐을 찾아 공항 밖으로 나오니 파란 하늘과 맑은 공기가 나를 맞았다. 나도 모르게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산천은 한국과 닮았는데 파란 하늘과 청명한 공기는 캘리포니아를 빼닮았다. 히로시마의 공기와 하늘을 한국에 가져가고 싶다고 생각하며 숙소가 있는 시내방향의 버스를 탔다.
황금 연휴 막바지의 히로시마는 마침 축제 중이었다. 차량 출입을 막은 넓은 도로에는 전통 옷을 입은 사람들이 환호를 하거나 춤을 추며 행렬을 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도로 옆에는 볶음 소바, 빙수, 깎은 과일 등을 파는 음식점이나 사격장이 차려진 임시 부스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과 연인, 친구들이 호객행위를 하는 그 앞을 기웃거렸다. 황금 연휴 끝이라 그런지 축제라고는 하나 몇 무리의 행렬이 지나간 도심은 차분한 분위기였다.
관광지로는 덜 알려진 그래서 덜 붐빌 것 같다는 단순한 이유로 며칠의 짬을 내어 히로시마를 여행지로 택했다. 나에게 히로시마, 하면 원자폭탄이 연상되는 것 말고는 특별한 호기심은 없었다. 검색해 보니 인구 100여만의 크지 않은 도시였다. 하루면 웬만한 곳은 둘러볼 수 있는 규모인 것도 가볍게 다녀오는 장소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축제 장소를 벗어나니 강이 보였다. 히로시마 시내에는 여섯 개의 강이 흐르고 있다. 단풍나무가 많은 히로시마는 가을이 되면 절경을 이룬다고 한다. 일본말로 단풍잎을 아기 손을 닮았다고 해서 ‘모미지’라고도 하는데 이 여섯 개의 강 모양이 내게는 모미지처럼 보였다. 한강이 남성미 넘치는 웅장한 강이라면 여섯 개의 오오타강 지류는 사람들을 품어주는 다정함이 있었다. 강을 건너는 다리는 여러 개였다. 주말에다 연휴가 겹쳐서인지 다리를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파리 센 강 위의 유명한 퐁네프가 생각났다. 히로시마가 물의 도시임을 이곳에 와서 알았다. 강 옆 모래밭에 앉아 멍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 강 따라 이어진 가로수 아래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여행객들의 모습이 군데군데 보였다. 어디선가 확성기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나라를 가든-특히 관광지에-기독교의 광팬들이 확성기로 떠드는 광경이 떠올라 예수를 믿으라는 열혈전도사려니 지레짐작했다. 일본사람은 어떻게 전도를 하는지 보고 싶은 호기심에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향했다.
다리 중간 지점에서 한 젊은이가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고 그 옆에 다른 젊은이가 확성기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들은 히로시마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었는데 전쟁을 반대한다는 메시지를 호소하고 있었다. (나도 그 배경을 알고 있다.) 이차세계대전에서 패한 일본은 1947년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다. 이 ‘평화헌법’에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며 군대를 가지지 않는다는 조항이 명시되어 있다. 해마다 4월 29일에서 5월 5일까지 긴 연휴가 이어지는 일본의 골든 위크 중에서 5월 3일이 새로운 헌법을 기념하는 ‘헌법기념일’이다. 아베 전 총리가 괴한의 습격으로 죽기 전에 이 헌법을 달리 해석하여 다시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었다. 히로시마 대학생들은 지금도 세상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멈추자는 청원도 함께 받고 있었다. 그들은 지나가는 나에게 청원서에 서명해 줄 것을 부탁했다. 외국인도 괜찮냐고 물으니 괜찮다고 하기에 서울 주소와 내 이름을 적고 서명을 했다. 내 한국주소를 본 학생은 반가워했다. 내친김에 모금함에 천 엔을 넣었다. 전쟁의 결정은 지도자가 하고 그 피해는 국민이 짊어지는 부조리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학생들의 호소가 어디까지 울려 퍼질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바랐다.
멀리서 원폭 돔이 보였고 가는 길 주변은 대부분 서양인 여행자들이었다. 원폭돔이 히로시마의 상징이라 관광객이 몰리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한 장소에 서양인이 이렇게나 많은 곳은 일본 어디서도 본 적이 없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를 좀 지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 시에 떨어졌다. 당시 30여만 명의 인구 중에서 20여만 명이 직접, 혹은 그 여파로 목숨을 잃은 세계 역사상 전대미문의 사건이 되었다. 당시의 모습을 유일하게 간직한 원폭 돔은 원래 히로시마현의 특산물을 전시하고 판매하기 위한 전시관이었다고 한다. 건물에 대한 안내문이 없었다면 예술가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현대 조형물로 착각할 만큼 생경할 뿐이지 그날의 처참함이 피부로 와닿지는 않았다. 80여 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끔찍한 과거는 강물에 흘러가 버렸는지 물의 도시는 덤덤해 보였다. 원폭 돔 주변의 넓은 땅에는 당시를 기념하는 건물과 상징물이 띄엄띄엄 퍼져 있었다. 보신각처럼 생긴 평화의 종을 어느 유럽 가족이 타종하며 사진을 찍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는 1945년 8월 6일의 아침 풍경,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몇십 초 후 거대한 하얀 버섯 모양의 구름이 솟아오른 하늘과, 지옥으로 변해버린 그날의 사진들과 영상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원폭피해의 참상은 맨 눈으로 대하기가 곤혹스러울 만큼 참혹했다.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들 엄숙하고 침울하게 당시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목도하고 있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 자료관을 보며 제주 사삼 평화기념관이 생각났다. 참상의 동기와 규모는 다르지만 그때를 일깨우는 사건의 기록, 영상과 사진, 그리고 어두운 조명을 보며 서로 다른 이유로 시작된 비극의 끝은 같은 점을 향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영문을 모른 채 피할 수 없는 힘에 속수무책으로 삶이 무너진 두 나라 희생자와 가족들의 고통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목숨을 잃은 히로시마 학생들의 사진을 보니 5.18 광주묘역에 잠들어 있는 한국의 청년들도 떠올랐다.
한국에 와서 자리 잡고 살면서 해야 할 거리 중의 하나가 5.18 광주 묘역을 찾는 일이었다. 그동안 해외에 살고 있어 세월호 때도, 추운 겨울 사람들이 거리에서 외쳤을 때도 나는 텔레비전만 보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적어도 그 역사적인 현장이라도 들러 미안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어느 햇살 가득한 날 처음으로 광주를 방문했다. 광주가 빛 고을이란 뜻이고 사방이 편편한 고장임도 가서 보고 알았다. 왜 빛고을이라 부르는지 이해가 됐다. 지형이 완만하여 어디서나 빛이 내려쬐던 평화롭던 마을이 한순간 끔찍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말렸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묘역에 안장된 무덤 옆 비석에는 교복 차림의 학생사진이 박혀 있었다. 사진 밑에 쓰인 그의 생몰연도와 어떻게 참변을 당했는지의 설명에는 가슴이 아려 나도 몰래 울음 섞인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학생들의 무덤은 끝없이 이어졌다. 피기도 전에 떨어져 버린 어린 청춘이 너무도 가여웠다. 일본의 학생복과 닮은 교복을 입은 사진 속의 무표정한 얼굴들에게 하염없는 미안함이 느껴짐과 동시에 분노가 일었다. 천수를 누리고 간 전두환과 그 일당에 대한 분노심이었다. 살아있다면 내 동생 뻘의 영혼들에게 안식을 빌었다. 히로시마시는 8월 6일을 평화기념일로 정하여 매년 그날을 기린다고 한다.
초록을 품은 히로시마는 평화로웠다. 강에는 유람선이 다니고 강위의 다리로는 자전거가 지나가고 전차에서는 사람들이 내리고 탔다. 삐까돈(원자폭탄의 속어)의 상처를 겪은 히로시마는 세계에서 찾아오는 관광명소가 되어 있었다. 언젠가 이곳에 다시 와서 찬찬히 둘러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삼박사일의 짧았지만 긴 여운이 남는 여행이었다. (2024.06.)
#히로시마#원자폭탄#제이차세계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