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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Mar 04. 2023

시리아의 두 자매

  한 달 전쯤 터어키(티르키에) 남부와 시리아 북부에서 커다란 지진이 났다. 아래 글은 내전으로 황폐해진 시리아에 관한 뉴스를 들었던 그무렵에 쓴 것이다


  2006년 12월 나는 카타르에 살면서 카타르 대학에서 아랍어를 배우고 있었다. 하루는 수업시간에 선생이 아랍어의 표준말은 시리아어라며 아랍어를 제대로 배우려면 시리아에 가보라고 했다. 선생의 말에 같이 수업 듣는 한국 학생이 다마스쿠스에 아는 선교사가 있으니 시리아에 가게 되면 소개해 주겠다고 거들었다. 그날부터 나는 <아라비아의 로렌스> 영화에 나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다마스쿠스를 여행하는 상상에 들떴다. 찾아보니 시리아는 비행기로 세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몇 달 뒤 남편이 출장으로 이 주 동안 집을 비우게 되자 나는 시리아의 선교사에게 내 소개와 함께 여행 일정을 이메일로 보냈다. 그는 흔쾌히 공항 픽업과 숙소 안내를 알아봐 주었다. 평소의 나라면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이런 부탁을 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리아라는 생소한 나라에다 언어의 장벽을 생각하니 자신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두려움은 대상을 모르는 데서 오는 경우가 많았다. 2007년 3월 다마스쿠스 국제공항에 내렸다. 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한 동양 남자가 눈에 띄었다. 마중 나온 선교사였다. 그를 보자 반가움과 함께 피곤함이 몰려왔다. 처음 밟는 사회주의 국가에다 아랍어로만 안내하는 기내방송에 긴장한 탓이었다.


  내가 열흘간 묵을 게스트 하우스 안주인은 대구댁이었다. ‘피곤하시지예,' 그녀가 건네는 인사말은 뜨셨다. 우리는 고향 친구를 만난 듯 금세 친해졌다. 주인 부부는 성지 순례차 시리아를 찾아온 한국인을 상대로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장님은 아랍어 학교를 다녔는데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 한국 방송이 나오는 텔레비전을 끼고 살았다. 대구댁은 ‘나가서 사람들과 말도 섞으며 아랍어 연습을 해야지. 저러다 언제 말문이 트이노' 하며 구시렁거렸다. 이방인의 삶에 이골이 난 나로서는 사장님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리아 같은 적성 국가에서 살면 타국에서 느끼는 외로움은 물론이고 유사시에 우리 정부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불안감은 또 얼마나 클까. 지천명의 나이에 식구를 이끌고 멀고도 낯선 나라에 둥지를 튼 가장에게 한국 텔레비전은 삶의 오아시스였을 것이다.


  시리아는 운치가 있었다. 전통 옷을 입는 걸프 국가와는 달리 시리아인들의 옷차림은 우리와 비슷했다. 우리나라의 이른 봄 같은 날씨에 여자들은 머리를 스카프로 감싸고 긴 외투를 걸치고 다녔다. 그 모습들이 내 눈에는 품위 있게 보였다. 아침이면 숙소가 있는 아파트 입구에는 집에서 짠 우유를 스테인리스 통에 담아서 파는 우유 장수가 왔다. 길에는 아낙네들이 쭈그리고 앉아 좌판에 야채를 펼쳐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불렀다. 투박하지만 정겨운 모습에 사회주의 국가라는 딱딱함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기원전 2000여 년 경부터 인류가 살기 시작했다는 시리아는 여러 문명의 덧칠이 더해져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하마디아 시장의 미로 속을 헤매기 일쑤였지만 현지인들은 이방인에게 친절했다. 내가 “앗살람 알라이쿰”(평화가 그대에게) 하면 “와 알라이쿰 앗살람"(그대에게 평화가)으로 응대하며 가던 길을 멈추고 나에게 길 안내를 자청했다. 다마스쿠스 우주 박물관에는 1987년 시리아인 파리스가 소련 우주선 ‘소유즈'를 타고 ‘미르’ 우주 정거장을 다녀왔을 때 입었던 우주복이 전시되어 있었다.  군사 박물관에서는 북한 화가 그림이 전시 중이었다. 곡괭이를 든 선동적인 그림도 있었지만 화가의 개성이 묻어나는 순수한 작품도 보였다. 그림 밑에 적힌 한국 이름 석 자를 보니 가슴이 뭉클하여 한참을 바라봤다. 하루는 주인아저씨가 다니는 아랍어 학교를 같이 갔다. 나도 아랍어를 배우던 터라 어떻게 가르치는지 궁금했다. 한국인 유학생 대다수가 기독교 선교사들이라 했다. 회교도의 유전인자가 뼈에 박힌 무슬림을 전도하기 위해 아랍어를 배우는 그들의 포교 열정에 감탄했다.


  나는 여행할 때 계획을 자세히 짜지 않는 편이다. 느닷없이 조우하는 것들을 즐긴다. 어차피 인생은 바라는 대로 흐르지 않으니 발길 닿는 대로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나를 맡긴다. 알려진 관광지보다는 보통 사람들의 고유한 일상이 더 기억에 남는다. 예를 들자면, 암묵적으로 앞자리의 빈좌석부터 채워 타는 마을버스에서는 뒷좌석에 타는 사람은 바로 앞 좌석 사람에게 어깨를 툭툭 치며 말없이 요금을 건넨다. 그 돈은 건네지고 건네지다 맨 앞에 앉은 사람이 운전기사 옆자리의 상자에 돈을 넣는다. 그들에게서 소박한 동지애가 느껴졌다.


  하루는 외출 준비를 하는데 대구댁이 “오늘 저녁은 월남쌈이니 너무 늦지 않게 와요” 했다. 다마스쿠스에서 월남쌈이라니 반신반의했다. 저녁에 돌아오니 집안에는 진한 닭국물 냄새가 가득 찼다. 옻칠이 벗겨진 자개 상위에는 닭국물이 든 냄비와 형형색색의 야채가 차려져 있었다. “오늘 무슨 날이에요?” 하고 물으니 “날은 무슨, 그냥 했지요” 하면서 씨익 웃었다. 카타르에서 나는 혼밥에 익숙했다.  바쁜 남편이 집에 늦게 오니 혼자 먹는 날이 많았다. 시리아에서 정성스레 지은 집밥에 한국말로 수다 떨고 한국드라마를 보며 지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호텔에 머무르며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썼다는 알레포를 가보고 싶었다. 대구댁은 알레포에 여동생이 살고 있으니 거기서 묵으면 어떻겠냐고 했다.  제부가 마침 출장 중이니 부담도 덜할 거라며. 이왕 신세 진 김에 내쳐 더 지기로 했다. 선교사와 공항에서 접선할 때처럼 내 인상착의와 교통편을 알리고 알레포행 버스를 탔다.  도착예정 시간이 다가오자 내릴 곳을 놓칠까  불안해졌다. 버스 정류장에  동생으로 짐작되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안도감과 반가움과 겸연쩍음이 엉킨 인사를 수다스럽게 했다. 동생은 언니와 달리 무척  차분했다. 낯을 가리고 조용한 성격이라는 것을 밤을 지내고 낮에 같이 시간을 보내며 알게 됐다. 집이 커서 그런지  말없는 안주인을 닮아서인지 동생의 집은 사람이 끊이지 않는 언니집과 달리 쓸쓸해 보였다.  동생에게는 초등생 아들이 있었는데  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우리는 시내 구경을 나섰다. 알레포는 수도인 다마스쿠스보다 작았지만 더 아랍스럽다란 인상을 풍겼다. 중세 시대를 연상하는 한적한 카페에 앉아 살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어디서 살든 산다는 것은 녹녹지 않음을 새삼 깨달았다. 조심스레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동생에게서 정 많고 마음 약한 언니와 달리 은근한 강인함이 느껴졌다. 도시 전체가 앤티크 가게 같은 알레포에서 옛날 물건을 파는 상점을 지나치다 주인장의 현자 같은 인상에 끌려 동으로 된 나침반을 샀다. 어제만 해도 낯설었던 사람의 집에서 자고,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듣고,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것이 대구댁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영화로왔던 유적지를 현재의 삶터로 끼고사는, 과거와 현재가 뒤엉킨 시리아. 그 여러 겹의 시리아는 2011년에 발생한 내전으로 피폐해졌다. (냉전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내가 카타르를  떠난 지 불과 수년 뒤였다. 시리아의 우주비행사 파리스가 티르키에서 난민 생활을 한다는 뉴스를 들었다. 대가 없이 나를 재워준 동생과 길손에게 편안한 쉼터를 마련해 준 대구댁 가족은 시리아를 무사히 탈출했는지. 나를 공항에서 맞아준 선교사와 그 가족은 어디서 지내는지.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에게 세상은 따뜻한 곳임을 일깨워준 사람들. 알레포에서 샀던 나침반으로 가끔 방향을 확인하곤 한다.  그들 삶의 나침반은 지금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 부디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이기를 바란다.                                                                    (2021.10)



#시리아#다마스쿠스#알레포#아랍어#파리스#우주인#카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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