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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Mar 16. 2023

담배의 추억

  유아인이란 배우를 좋아하게 된 것은 영화 ‘완득이'를 통해서다. 영화에서 유아인은 불우한 환경 속의 고등학생역을 했는데 그의 풋풋한 연기에 반해 팬이 됐다. 얼마 전 그가 프로포폴과 대마 의혹으로 조사를 받고 있다는 신문 기사를 보며 마음이 짠했다.  올 1월에서 2월 중순 사이  나는 미국에서 지냈다. 아들이 살고 있어 1년에 한두 번은 가게 된다. 유아인 뉴스가 한국에서 터진 시점보다 며칠 먼저, 우연히도 내가 머물렀던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대마에 관한 새로운 법안이 추진 중이라는 기사가 났다. 기사의 머리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휘청되는 대마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대마 가게에서 음식도 팔 수 있는 법안을 신중히 검토 중’이라는. (캘리포니아는 성년(21세)이 되면 자유롭게 대마를 살 수 있다.) 여태까지는 대마 가게에서 대마를 사거나 피우는 것만 가능했던 것이 앞으로는 음식을 주문하여 먹으면서 대마를 즐길 수 있다는 말이다.  과연 대마의 천국이다.


   샌프란시스코 시내와 주변 도시를 다니다 보면  대마 냄새를 쉽게 맡을 수 있다. 공원에서도 나고 주택가에서도 난다. 쑥 태우는 냄새랑 비슷하다더니 정말 그랬다. 담배 연기보다는 순한 것 같았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담배 연기를 공기마시듯하며 자랐다. 대학 가느라 집을 떠나기 전까지 간접흡연을 한 셈이다. 아버지는 골초였다. 안방의 아버지 책상에는 크리스털 재떨이가 있었는데 아버지의 분신처럼 보였다. 아버지의 단벌 양복, 주로 바지, 은  담배구멍을 기운 자국이 여기저기 있었지만 자세히 안 보면 눈에 띄지 않았다. 세탁소 아저씨의 솜씨 덕분이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휘청거리며 퇴근한 날이면 어머니는  아버지의 양복을 이 잡듯이 살폈다. 담뱃재로 생긴 구멍을 발견하면 이튿날 아침 집 앞의 세탁소로 달려가서 급행 수선을 부탁했다.  양복이라곤 한 벌밖에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정을 잘 아시는 세탁소 사장님은( 그집 아들과는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던 나로서는 무지 창피했지만) 하던 일을 제쳐두고 구멍 난 아버지의 양복을 깔끔하게 메꿔주셨다.  


  대학에 들어가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이었는데 ‘여자가 감히'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여자가 벌건 대낮에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욕을 처먹을 용기를 필요로 했다. 소심한 나와 친구들은 강의가 끝나면 남의 학교 근처 다방으로 원정을 가 구석자리에서 담배 연기를 뿜어댔다. 그 당시 다방은 칸막이가 쳐있고 조명이 어두컴컴하여 담배질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어린 자식들과 마누라의 건강은 아랑곳 않고 방 안에서 담배를 즐기던 이기적인 아버지를 무척이나 미워했다. 그랬던 내가 방학 때 집으로 내려오면 내 방에서 몰래 담배를 피웠다. 욕하면서 닮는다고 했던가. 어느 순간 나는 아버지의 닮은꼴이 되어있었다.  내 방에는 골목으로 난 창이 있었는데 창문을 열어놓고 피우면 식구들이 모를 거라 순진하게 생각했다.  어느 날 모친에게 들키고 말았다. 어머니의 등짝세례와 이어지는 팔자타령, 긴 한숨과 잔소리에도 내 담배행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담배와의 은밀한 관계는 결혼 후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예순이 갓 지난 아버지가 후두암에 걸렸다. 담배가 원인이라고 의사가 말했다. 수술과 항암치료로 완치가 되긴 했지만  목에 구멍이 난 아버지는 남은 삶을 쇳소리를 내며 보내야 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정신이 번쩍 났다. 내 목에 구멍이 뚫린 모습을 상상하니 무서웠다. 그날로 담배와 아듀 했다. 아버지도 물론 끊었다. 그러고 보면 맘 편히 담배 연기를 뿜은 적이 없었다. 음지에서 도둑고양이 마냥 살금살금 했던 것 같다. 막상 끊고 나니 자유로웠다. 더 이상 조마조마하게 살지 않아도 되니 광명을 찾은 기분마저 들었다.


    지난겨울 도쿄를 찾았다. 아오야마를 걷다 한 카페에 들렀다. 우타타란 이름의 작은 카페는 서너 명이 앉을 수 있는 카운터와 이인용 테이블 하나가 전부였다. 이인용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잠시 후 양복차림의 두 남자가 카페에 들어왔다. 그들은 카운터에 자리 잡고 앉더니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이래도 되나 싶어 주위를 살폈다. ‘낮에는 커피, 밤에는 술, 그리고 담배 오케이'라는 문구가 벽에 붙어있었다. 그 광경을 보니 몇 년 전 도쿄의 한 우동집을 갔을 때가 떠올랐다. 미닫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실내는 뿌연 연기가 자욱했다. 테이블마다 재떨이가 놓여있었고 일부 손님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비흡연 손님들도 있었지만 서로 개의치 않아 보였다. 당시 한국에서는 실내에서 금연이 시행되던 때였고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 남에게 민폐 끼치는 것(메이와쿠)을 극도로 꺼린다는 일본인의 이중성에 놀랐다.  담배는 예외인가. 어쨌거나, 담배에 관대한 나라, 일본이어라.

 

  나에게 여행은 일탈이다. 알아보는 사람 없는, 온갖 인종이 모여사는 미국 같은 나라라면 더욱 그렇다. 길에서 지나치는 사람들이 일가친척처럼 보이는 단일 민족 대한한국에서 살다가 외국에 나가면 나는 충동적으로 과감해진다. 지난 여름 아들 집에 갔을 때다. 하루는 저녁식사 후 불현듯 담배 생각이 났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피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일었다. 어디서 담배를 파는지 모르니 아들의 조력이 필요했다. 뜬금없는 내 요구에 아들은 쿨하게 그러냐며 담배가게로 나를 데리고 갔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아들이 무슨 담배를 원하냐고 묻는데 난감했다. 순간 88이란 숫자가 표시된 파란 껍질의 담뱃갑이 머리에서 스윽하니 떠올랐다 사라졌다. 제일 순한 것을 사달라고 했다. 담뱃갑을 뜯어 담배를 꺼내자 내 왼손은 기억하고 있었다. ‘반갑다, 담배야' 하듯이 왼손 검지와 중지는 익숙하게 담배를 받쳐 들었다. 설레는 기분으로 한 모금을 들이켰다. 몇 십 년 만이라 그런지 머리가 띵한 것이 어지러웠다. 아들은  늙어가는 어미에게 연민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사형수의 소원을 들어주려는 간수처럼. 떠나는 날 아들에게 남은 담배와 라이터를 돌려주었다. ’ 아들아, 네 손으로 처분해 줘. 그동안 잘 즐겼다 ‘라고 덧붙이며.


  이번에 갔더니 아들이 담배를 내놓았다. 내가 버리라고 건네준 담배였다. ‘조금만 피세요’, ‘오케이' 하며 얼른 받아 챙겼다. 미국에서 흔히 보는 표시가 ‘At your own risk’이다.  스스로 판단해서 행동하되 책임을 지라는 뜻이다. 공원 같은 공공장소에도 금연표시는 눈에 띄지 않았다. 커다란 쓰레기통이 적당한 거리마다 놓여있을 뿐이었다. 하루는 해변을 거닐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묘한 쾌감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옆에서 같이 걷던 남편이 한마디 했다. ‘그리 좋냐? 그런데 괜찮겠어? 한국 가면 실내서는 물론이고 바깥에도 금연장소가 많아 쉽지 않을 텐데.‘ ‘걱정 마, 지금은 여행 중이니 자유롭게 여행의 패키지를 즐길 뿐이야. 일상으로 돌아가면 세팅을 새로 맞춰야지.’


   담배는 인체에 해롭고 중독성이 있다. 의학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아는 상식이다. 그에 반해 대마(초)는 중독성이 없고 약용으로도 쓰인다고 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인체에 해롭다는 경고를 날리며 버젓이 파는 담배는 중독이 돼도 괜찮고(at your own risk) 대마가 합법인 외국에서 잠시 맛을 보고 한국 땅을 밟는 순간 몸에 흔적이 남아있으면 죄가 된다는 점이다. 한국법이 그렇다고 하면 할 말은 없다. 다만 젊은 청년 유아인도 나처럼 일탈을 즐기지 않았을까?  일탈의 대가치고는 가혹하다는 기분이 든다.  여행에서 돌아온 이튿날 아침 예전처럼 집 뒤의 산을 걸으려고 집을 나섰다. 지구 반대편에서의 생활이 그새 꿈처럼 느껴졌다.      (2023.02)


#샌프란시스코#토쿄#추억#담배#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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