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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회사가 싫다 2

by vakejun


'차마고도'를 다녔다.

끝도 안 보이는 계단의 연속을 나는 그렇게 불렀다.

매일이 수련이었다.

계단도, 일도..

그 흔한 에스컬레이터 하나 없이 보이지 않는

앞날과 같은 출구를 그렇게 올랐다.


수행은 계속된다.


사장이 아주 지독하다 못해 표독스러웠거든.

절실한 신자에, 정치에 한발 담근 사람으로

'자기 신념'이 아주 뚜렷한 양반이었다.


말투와 태도엔 성품도 따라갔다.

빈말할 줄 모르고 농담이라곤 없는데 비아냥거리기는 잘하더라.

비아냥으로 치자면 나랑 견줄 만하다.


경리 및 모든 뒤치다꺼리를 맡고 있던 '진짜' 둘째 딸에게 대하는 행동이 그를 말해주고 있었다.


'윽박지르다' 이게 맞는 표현이다.


한 가족이 맞다고?

주워온 자식도 저 정도론 안 하겠다 싶을 정도로.

그는 왜 그렇게 둘째 딸을 쥐 잡듯이 잡을까..


마른 체구에 귀염상이었던 둘째는 눈에 담은 것이 없어 보였다.

텅- 비어있는 눈.


제 피 나눠준 딸도 그러한데 나란들?

딸은 늘 화풀이 상대였고, 그 대단한 플레이에 디자이너들은 낙엽 떨어지듯 나가떨어졌다.


사장은 심심하면 전화를 해 본인의 신념이 담긴 슬로건을 외치며

"안녕하십니까? 어쩌고 저쩌고 하는 뭐시깽이입니다!"

이번에 공천이 되면 뭐라 뭐라.. 잘 알지도 못하고 알기도 싫다-로 일관하자

웬걸? 그것도 보기 싫었나?


유명하지도 않은 정치인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

그럴듯한 연설문을 준비하고 정갈하게 프린트해

나에게 교정 및 교열을 맡겼다.


그래, 띄어쓰기 정도쯤이야, 행간 정도는 고쳐주자.

오지랖이었다.


그렇게 잡다한 일은 시작됐다.

일은 그렇다 치고 점심이 무시가 안 됐다.


사장은 회사에서 5분 거리 내의 가게 이상은 절대 가지 않았다. 하루는 여기 김치찌개, 다음은 저기 된장찌개, 모레는 알밥.

정해진 세 군데에서 매일 ‘뭐 먹을까요?’는 왜 묻는지..

(킹받는다)

말 한마디 없이 먹는 점심은 고문이었다.



사장 딸은 디자인을 전공하지도 배우려는 의지도 없는 것 같았다. 몇 번 인가 사장의 부탁을 받은 사람들이 시도는 한 것 같았으나.. 요지부동이었다.


눈에 아무것도 담지 않고 무엇도 자신에게 담길 거부 했다.


어느 날 옆을 쳐다보니 멍하니 모니터를 보며 초조함을 조용하게 드러냈다.

집요하게 손톱 끝 살을 물어뜯고 있던 딸.

애정결핍이구나..

점심 먹을 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 확인한다.

그 마른 손가락 마디가 엉망이다.

애정결핍이 맞구나.


사장님에서 '놈'으로 바뀐다.


사장 놈은 미국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는, 정석 그대로의 공부 잘하고 고분고분한(본인에게) 첫째가 있었고, 내 옆에 앉아있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의 둘째, 늦둥이 격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어린 셋째.

이렇게 편애와 격차 심한 가족을 거느리고 있었다.



'**씨. 밥 먹으러 갑시다! 나 오늘 월급 받았어!'


어리둥절한 둘째 딸을 데리고 냅다 튀었다.

물론 사장에게는 너 혼자 드시라 하고.


그렇게 우리는 자주 점심식사의 일탈을 감행했다.


회사를 다닌 역사 이래 나와서 먹는, 따로 먹는 식사는 '처음'이라고 했다.

눈에 살짝 빛이 감도는 것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동지는 아니었지만, '위에서 밟히고 밑에서 치이는' 감정은 몰라도 동생뻘의 그 아이의 공허한 눈빛은 사장 놈을 향한 적대감을 증폭시키는데 한몫했다.



엄마가 주기적인 검사를 받으러 서울에 오시던 날.

연차도 아니고 시간반차를 쓰겠다 요청했다.

이 바닥에 휴가가 어딨고 연차, 월차가 어딨겠나.

나오라면 주말도 반납하고 출근은 있어도 퇴근은 없는 게 실정인 걸.

대단한 걸 요구한 것도 아닌데

벌써 사장 놈은 '맘에 안 든다'가 역력하다.


검사를 마치면 몇 시냐-

대략 빨라도 5시쯤, 강남에서 오는 시간까지 감안- 바로 퇴근하겠습니다.


안돼!


오라고 한다. 기가 막힌다.

잘못들은 건지 확인한다.

잘 들은 게 맞다.

오기가 생긴다.

엄마에겐 미안하지만 검사 후 제대로 된 밥 한 끼 대접 못 해드리고 배웅만 해 드리고 회사로 복귀했다.


너 이제 뭐 하나 잡히기만 해 봐.

별렀다.



잡일을 시킨다.

딸과 나는 인쇄골목 어느 허름한 곳에 앉아있다.

보통 이런 단순 노동은 시간당 페이를 주고 알바생을 고용하곤 한다.

그 돈도 아까운 거냐?

토요일 출근시켜 지는 퇴근하고 신데렐라 마냥 이거 다 끝낼 때까지 집에 못 가!

구박이 떨어졌다.

하긴, 제 딸도 시키는데 나라고?

달리 생각하면 딸은 그렇다 치고 난 뭔 죄?



이 회사를 관둬야 할 이유만 자꾸 쌓여간다.

걸핏하면 우레 같은 소리를 버럭 질러가며 사람 간을 떨어트려 심장을 부여잡고 마우스질을 해야 했다.

심심하면 고상한 욕을 골라 거래처나 다른 이를 까는 것 같지만, 우리는 안다.

알아서 기어-라는 것을.


전우애를 가지고 딸과 나는 사담을 나눴다.

딸은 디자인도, 경리도 싫다. 아빠도 싫다.

CGV에서 서비스직 하는 게 자기는 꿈이라고 했다.


소박하다.

그 아이에게도 '하고 싶은 것'이란 게 있는 건 다행이지만 그거 안 하고 왜 여기 있어? 가 먼저 나왔다.

너네 아빠한테 기죽을 사람 아니니까 내 걱정 말고 관두라고 했다.

관두는 것 또한 꿈이란다.


도대체 이 놈의 가족은…



명절 앞 기차표 예매를 앞두고

일도 없는 한가한 사무실, 사장에게 물었다.

평일, 두어 시간만 빨리 퇴근할 수 없겠냐고.


안돼!!


그래, 저 양반이 한 번에 오케이 하는 꼴을 기대하면 안 되는 거다.

뒤늦게 왜냐고 묻는다.

명절날 내려갈 표를 미리 못 구하면 갈 수가 없어 그랬다-

들은 척도 안 할 거면서 왜 묻는 건지.. 사람을 놀리는 방식도 귀찮기 짝이 없다.



명절 하루 전,

정말 웃음밖에 안 났다. 진짜다.

"**씨 오늘 한 시간 일찍 끝내고 퇴근해요."

(값싼 친절에 하마터면 큰 절 할 뻔했다)


바쁜 척을 하며 얼굴도 보지 않고 대꾸했다.

아니오!


당황하더라.

어서 와- 부정적인 대답은 당신도 처음이지?


왜?라고 묻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너 급하지 않았냐는 투다. 자기의 선심을 물리치는 게 더 궁금하고 '네가 감히'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제시간에 퇴근하고 갈게요.

왜?라는 핵심이 얼굴에 가득한 채 또다시 반문한다.

그 선심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물음표가 난무하는지 모르겠다.


"아쉬운 소리 하기 싫어서요."


말투와 내용이 왜 그딴식이냐는 반응이 돌아온다.

예, 정확해요.

'대든다'에 가깝다.

붉어지는 격분을 담고 있었지만 더 이상의 요란은 안 떨더라. 쓸데없는 데서 자존심도 세구나 너란 양반은.


직급 떼고 딸을 불렀다.

"**씨, 커피 마시러 가자. 언니가 쏠게!"




싫은 환경 오래 버티는 것도 시간 낭비,

결단력은 빠를수록 좋다!라는 주의다.


얼마 후 차마고도는 관뒀고 둘째보다 먼저 가게 돼서 이렇게 돼서 미안하다고..

너도 여기에 얽매이지 말고 다른 일을 찾길 바란다-고 이야기했다.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했고 둘은 다시 만나지 말자고 했다.


여담으로 여름방학 미국에서 온 첫째는 사무실에 찾아와 아빠와 동생에게 인사를 한 후 날 보며 말했다.


"우리 아빠 되게 힘들죠?"


응. 많이 치사하게 굴고 짠돌이에 자기밖에 모르더라.

"네." 어색하게 웃었다.

이치에 맞지 않다. 저런 아빠에 저런 자식이라니.

외탁했구나.



퇴사 후 남은 건 다리에 남은 통증이었다.

엄마의 유연한 유전자를 물려받아 스트레칭에 아무런 고통이 없던 몸인데 일자로 다리 찢기가 안 됐다.

1년은 족히 가더라. 그때마다 차마고도를 욕했다.

내가 다신 그쪽으로 세수도 하나 봐라!

이를 갈았더니 한 동안은 내가 무슨 동에서 일을 했는지 생각이 안 났는데 희한하게 묘한 쾌감도 있었다.



경고한다.

가족회사라고 다 같은 '가족'이 아니다.

'족' 같으면 떠나는 게 맞다.

그 들은 '내 가족'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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