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는 피식하고 웃었다.
언니 오빠는 엄마 아빠에게 한 번도 해 본 적 없던
밤인사 인걸 알고 있다.
그들에 비해 겁이 없고 거리낌도 없던 나는 종종
생뚱맞게 굴었다.
"나는 커서도 엄마 아빠한테 존댓말 안 할 거야."
왜냐고 물으신다.
"왠지 거리감 있어 보이잖아. 그러니까 쭈욱 반말할게."
기가 차 하시면서도 싫다는 말씀은 안 하신다.
그래도 엄마의 훈육은 아빠에 대한 가장의 존중을 잊지 말라는 당부를 늘 인식시키셨다.
'진지 잡수시라고 말해라'
밥은 아빠가 먼저 먹고 나서,
다툼이 있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도
'미워마라, 그래도 네 아빠다'
뭐 그런...
지금 생각하면 한창 놀고 싶을, 놀아도 될 내 나이 언저리, 부모님은 자식 셋의 뒷바라지에 매진하셨다.
꼴찌로 태어난 내가 욕심을 부리니 엄마의 발목을
붙잡는 것 같은 죄책감도 들었다.
편입을 포기했다.
집을 나와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효도는 그저 전화기로만 흘러갈 뿐이었다.
지금은 엄마에게 "하셨어?", "잘 자요", 같은 존대를 군데군데 하곤 한다.
엄마도 대우를 받아야 할 것 같아 시작된 자연스러운 인사였다.
아빠에겐 그런 말을 해본 적이 없다.
본가를 내려가면 시외버스 정거장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아빠를 볼 수 있다.
은근히 반갑고, 쑥스럽고, 요상한 기분이 들지만 우리는 침묵을 고수했다.
그냥 한번 물어본다.
"엄마는?"
과자가 집에 없는데 마트는 가지 않아도 되냐고 되물어온다.
그게 전부였던 것 같다.
운전을 할 때 기어에 올린 손을 여러 번 확인하는 늦둥이 운전자 버릇을 기억한다.
나이에 비해 늦게 흰머리가 생겼던 아빠는 지금쯤이면 더 늘어났겠지, 짙은 쌍꺼풀은 조금은 내려왔겠지.
여러 상상을 해보지만
도저히 얼굴이 그려지지 않아 속상하다.
공교롭게도 언니는 아빠와 생일이 같은 날이다.
두 번째로 밀려나곤 했던 생일에 대해 언니는 단 한 번도 군말하지 않았다.
나는,
언제쯤 군말 않고 살 수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