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난 유치원을 다니지 못했다.
시골에는 작은 초등학교가 전부였고 내 유치원은 TV였다. 난 세상 모든 아이들이 TV유치원을 보고 자란다고 생각했다. 학교처럼 다니는 유치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의 충격이란...
아무튼 난 학교에 일찍 들어가고 싶어 안달 난 어린아이였다. 입학하면 쓰라고 미리 사준 빨간색 피노키오 가방을 하릴없이 메어보고 학교 가는 시늉을 했다.
난 할 줄 아는 게 너무나도 많았기에 이 능력을 맘껏 발휘하고 싶어 똥줄이 탔다. 아침이면 정갈하게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세상 신기한 것들을 보고 느끼며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다. 이쁘장한 선생님은 나의 태세도 파악하는 아주 무서운 능력의 소유자였는데 "자, 티브이 앞에 바로 앉아서 보는 친구들~ 너무 가까이서 보는 친구! 조금 더 멀리 떨어져서 봐야 해요! 거기 그 친구!" 헉, 나를 콕 집어 티브이 앞에서 떨어지랜다. 낭패다. 나의 모든 걸 알고 있다.
난 엄마의 말을 되새겼다. 선생님은 모든 걸 다 알고 계신다. 그러니 선생님과 엄마에겐 절대 거짓말을 해선 안된다! 고..난 슬며시 티 안 나게 방구석 젤 끝자리로 이동했다. 엄마와 선생님이란 존재는 당시에 믿었던 예수님, 하나님과 거의 동급이구나를 몸으로 깨달은 것이다.
엄마는 나와 제일 많은 시간을 함께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농사일로, 집안일로 바쁜 엄마는 가끔 성의 없는 대답으로 일관하신 거 같다. 조금 맘 상하네..
학교에 가고 싶어 안달 난 어린아이는 한글도 깨쳐 구구단도 깨우쳐 그림도 잘 그려 못하는 게 없었다. 발산할 데가 없다. 엄마를 붙잡고 늘어졌다. 아이들과 노는 시시껄렁한 소꿉놀이 인형놀이는 너무 뻔했고 재미가 없었다. 짧은 아침의 유치원시간이 끝나면 난 세상이 시시해졌다. 엄마를 붙잡고 난 구구단을 외우기 시작했다. 2단부터 9단까지를 좔좔 외면 엄마는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세상에! 이게 뭐라고 그 바쁜 엄마가 나에게 이리도 달콤한 말을 해준단 말인가? 난 좀 더 난이도를 높였다. 9단부터 거꾸로 9x9=81, 9x8=72...
이런 식으로 2단까지 마무리를 하고 나면 또 엄마의 어김없는 칭찬소리! 난 세상에서 엄마의 칭찬이 제일 좋았다. 할 줄 아는 모든 것을 총동원했다. 엄마 이거 들어봐- "가갸거겨고교 구규... "
아, 짠하리만치 내 능력의 모든 것을 뽐낸다. 하고 또 하고 응용도 해가며 목마른 칭찬의 달콤한 허기를 채워나갔다. 일에 치인 엄마는 그런 내가 지겨울 수도 있었겠다 싶다. 가끔 영혼 없는 '잘했어'란 억양 없는 말투가 그러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난 충분히 인정받고 똑똑한 아이임을 증명했고 그것을 엄마가 알고 있다.
지독하고 집요한 관심병이었다. 칭찬..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어마무시한 그 말한마디에 어린아이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거다. 바쁜 엄마를 위해 방정리를 하고 깨끗하게 청소를 했다. 쏟아지는 고맙다는 엄마의 칭찬. 아, 그때부터였나.. 내팔에 생활근육이 늘어난 게.. 아찔하고 혼미한 마법 같은 말이 아닐 수 없다. 100점을 받고 상을 받아오면 엄마는 늘 고맙다고 말씀해 주셨다. 받아쓰기 100점, 바른 글씨 쓰기 1등, 그림 그리기 대회 전교 1등(당시 초1임을 밝힘) 도 내, 군 학력고사, 월말 고사 1등.. 모든 상이란 상은 엄마를 위해 바쳤다.
"엄마가 고마워" 그 말 한마디 듣기 위해서...
하나 빌어먹을 사춘기는 칭찬보다 더 센 무언가가 필요한 시기였을까.. 더 이상 난 칭찬에 허기진 아이가 아니었다. 평범한 십 대의 사춘기를 이해해 줄 말 한마디가 전부인 것 같기도 한데 엄마와 아빠는 나의 십 대를 방관하셨다. 나도 엇나간 건 사실이지만 더 이상 '가나다라'를 외워 칭찬받을 시기가 지난 거다. 학교는 가고 싶지 않았고 칭찬은 더 이상 날 춤추게 하지도 않았으며 딱 죽고 싶은 사춘기 말없는 아이로 변해버렸다. 그래도 날 완성시킨 근본의 태상은 엄마임이 틀림없다.
아직도 난 엄마에 대한 집착이 심하다. 엄마와 통화를 못하면 안절부절못하고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온갖 걱정을 사서 하는데 정말 스스롤 피곤하게 하는 타입인 거다. 그래도 멈출 수가 없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내가 정신줄을 놓고 발악을 할 때 엄마의 말을 기억한다. "엄마만 있어도 산다며! 왜 이래 정신 못 차리고!" 아, 그렇지.. 난 아빨 미워했지. 차라리 없어서 그리워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머리통을 부수고 입을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후회하지만 나의 불안과 암울은 당시에 그렇게 말하고있었다.
우울증 약을 한 1년 가까이 먹고 나서 처음으로 나 자신을 마주했을 때 난 내가 서럽고 몹시도 가여웠었다. 참 시궁창 같은 기분이었는데 희한한 건 비로소 난 제대로 울 수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느꼈다. 어지간한관종은 비교도 못할 만큼 관심에 칭찬에 애정을 갈구하는 나약하고 서러운 동물이라는 것을..
유치원을 못 나와서 안타깝고 자해로 물든 내 십 대가 가엾고 서른이면 죽어야지 하며 보낸 이십 대가 어리석고 서른이 넘어 걸린 내 원인 모를 병과 첫 장례를 치른 게 내 아버지의 장례라는 게 무척이나 한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배웠던 중1 영어교과서 첫 다이얼로그,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이 지식인의 거지 같은 말은 빌어먹을 교과서에서 제발 사라져 줬으면 하는 개인적인 소망. 정말 편협하고 아니꼬운 말이 아닐 수 없다. 뒤틀렸대도 상관없다. 원래 없는 자의 바람 같은 건 이루어져도 본전 안 이루어져도 그만이라..
나의 지독하고 집요한 관심 어린 병은 아마 평생 이어질 거 같으니 저 정도 바라는 거 소위 지식인들의 잘난 분석이면 내 해명도 해 주지 않겠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