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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 읽기

『체스 이야기』

by 새벽

(슈테판 츠바이크, 1942)


슈테판 츠바이크.

자신을 '우연한 유대인'이라 부른 독일어를 썼던 유대인.

60살, 망명지 브라질에서 부인과 함께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는 살면서 인기와 명성은 충분히 누린 인기 작가였다고 한다.

『체스 이야기』는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소설이다.

체스 외에는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시골뜨기, 냉혈한, 그로테스크한 체스 챔피언 첸토비치. 그가 배 안에서 내기 체스를 두게 된다.

상대는 첸토비치의 상대에게 훈수를 두며 자신의 존재를 알린 B 박사.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법률 사무소를 운영하다 나치에 끌려간 인물인데, 그의 이야기가 특히 독자의 눈길을 끈다.


그가 끌려간 곳은 흔히 알려진 강제수용소가 아니라 어느 도시에 위치한 작은 호텔이었다. 얼핏 보면 수용소라고 생각되지 않는 뭔가 대우를 받은 느낌이지만, 그곳은 서서히 인간을 미쳐가게 하는 곳 같다.

“필요한 자료를 우리에게서 억지로 빼내려 거친 채찍이나 육체적 고문보다 훨씬 더 섬세하게 작동하는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했는데, 그건 아주 닳고 닳은 방법인 고립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그저 완벽한 무(無)의 상황에 세워두었던 겁니다.” (45)


“생각 자체는, 사실 생각이 그렇게 실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버팀목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생각은 맴돌며 무의미하게 자전하기 시작하거든요. 생각도 무(無)를 견디지 못합니다. 뭔가를 기다렸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46)


“소름 끼치는 무의 압박으로 인해 제 신경이 어떻게 풀어지기 시작하는지 점차 느낄 수 있었습니다.” (50)


무(無)의 압박으로 서서히 미쳐가던 그가 책 한 권을 훔치는데, 그의 손에 들어온 책이 바로 체스에 관한 것이었다. 그 후 박사는 광적인 집착으로 체스 게임을 한다. 자신의 또 다른 자아와 치열하게 두는 체스. 물론 그 모든 것이 다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거의 식음을 전폐하고 분열된 자신과 두는 체스 경기에만 몰두하던 그는 급기야 쓰러지고, 정신 병원에 수감 후 석방된다.


배에 탔다가 우연히 보게 된 체스 게임. 그는 상상 속에서만 두던 체스를 실제로 두어보고 싶단 호기심 때문에 첸토비치와의 매치에 동의했다고 밝힌다.

“제가 관심을 갖고 시도해 보려는 건, 오로지 그때 호텔 감방에서 둔 것이 정말 체스였는지 아니면 그게 이미 광기였는지, 당시 제가 위험한 낭떠러지 바로 앞에 서 있었는지 아니면 이미 그걸 넘어섰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때늦은 호기심 때문입니다.” (73)


체스 챔피언과 책으로 배우며 상상 속에서만 체스를 둔 두 천재들의 게임.

게임 장면은 긴장감을 한껏 끌어올리며 독자를 단숨에 사로잡는다.

거기다 게임을 구경하는 구경꾼들의 심리 묘사까지.

역시... 작가의 대단한 글빨.


“그렇듯 흔들리지 않는 그의 거만함이 한번 꺾이는 것을 보고자 하는 우리의 요구는 더더욱 커졌다. 평화롭고 느긋했던 우리 승객들에게 갑자기 거칠고 공명심 넘치는 대결의 욕구가 솟구쳤다. 바다 한가운데 있는 배 위에서 체스 챔피언으로부터 승리의 월계관을 빼앗을 수 있다는 생각이-그렇게만 된다면 그것은 모든 전신국에서 전 세계로 번개처럼 순식간에 퍼질 만한 기록이 되는 것이다-아주 도발적으로 우리를 사로잡았다. 게다가 위험한 순간 우리를 구해준 자의 예기치 않은 개입으로 비롯된 신비함에 묘한 자극을 받았다.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겸손함과 프로 선수의 흔들림 없는 자신감의 대조도 우리를 자극했다.”(37)


“세계 챔피언으로서 무수한 시합을 휩쓸어온 체스의 달인이 이십 년 혹은 이십오 년간 체스보드에 손도 대지 않았다는 무명 씨에게 백기를 든 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익명의 우리 친구가 이 세상에서 가장 막강한 체스 선수를 공개시합에서 이긴 것이다!” (79)


에... 그러니까...

아주 가끔은 이런 일이 일어나기도 하나보다. 물론 살면서 이런 드라마 같은 일을 볼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드라이해 보이는 그러나 섬세하고 세련된 신사의 얼굴 같은 느낌의 글? 물론 순간순간 가슴이 쫄깃해지기도 했고.

넷플 시리즈 <퀸즈 갬빗>의 마지막 장면, 베스가 모스크바의 한 광장에서 노인들과 체스를 두던 장면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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